마하반야바라밀다경(摩訶般若波羅蜜多經)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사리자(舍利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 사리자(舍利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시고(是故) 공중무색(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무안계(無眼界) 내지(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 무무명(無無明) 역スジ雌?亦無無明盡) 내지(乃至) 무노사(無老死)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보리살타(菩리薩埵)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 심무가애(心無가碍) 무가애고(無가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 삼세제불(三世諸佛)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뇩多羅三藐三菩리) 고지(故知)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진실불허(眞實不虛) 고설반야바라밀다주(故說般若波羅蜜多呪) 즉설주왈(卽說呪曰)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3번) 반야심경을 한번 해석해 보려고 한다. 이유는 반야심경에 공과색의 관계에 대한 이치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며, 또 다른 하나는 “사마디 또는 본래마음”의 상태가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을 해석하여 보기 전에 “열역학 제1법칙”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려 한다. Energy can be changed from one form to another, but it cannot be created or destroyed. The total amount of energy and matter in the Universe remains constant, merely changing from one form to another. 에너지는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되어지거나 소멸되어질 수가 없다. 에너지와 matter(이 단어는 어떠한 뜻으로 쓰여 졌는지 잘 모르겠어서 영어 그대로 옮겼다.)의 우주 내에서의 총량은 늘 일정하게 남아있다, 단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 변할 뿐이다. 즉 위의 이야기를 요약한다면 에너지의 우주 내에서의 총량은 더 이상 창조(생겨날 수도)되어질 수도 또는 파괴(소멸 되어질 수도)되어질 수도 없으므로 일정불변(一定不變)이나, 다만 그 형태는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한다........가 될 것이다. 위의 이야기를 풀어 본다면 우주 내에 어찌하여 생겨졌는지는 모르지만은, 일단 생겨진 우주내의 에너지의 총량은 불변이며, 그 총량에서 새로이 창조되어져서 증가하거나 또는 에너지가 소멸하여서 감소하는 그러한 일은 없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헌데 지금 생겨진 상태에서 증가 하거나 감소할 수가 없다면, 애초에는 어찌 생겼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지금도 새로이 생겨날 수가 없다면, 애초에도 새로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닐까?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자 돌아가서 위의 열역학 제1법칙을 다시 한번 요약하여 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에너지는 새로이 생겨나거나 소멸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일정하여서 불변이다. 단지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할 뿐이다.) 이러한 법칙은 언 듯 보면 모순으로 보인다. 이유는 새로이 생겨나거나 소멸할 수가 없으며 일정하여서 불변이라는 말 자체는 불생불멸(不生不滅) 과 불변(不變)을 이야기 하고 있다. 허나 뒤이어서 나오는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하나의 형태로 변 한다”는 문장을 보게 되면 이것은 “불변”이 아니라 “변(變)”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한 대다수의 우리는 현상에서 변하는 것 모두는 기필코 소멸한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위의 법칙을 요약 한다면 “불생불멸의 불변이, 변하여서 생멸을 거듭 한다”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다. 물론 에너지가 변한다고 생멸을 거듭하지는 아니한다. 허나 에너지가 색(色)의 모습을 띈다면, 겉모습을 볼 때에는 생겨났다가 소멸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즉 위의 법칙에서 몇 가지 모순인 듯 한 것이 보인다. 하나는 지금 생겨진 에너지가 창조되어질 수가 없다면 애초에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의문이고, 하나는 전체가 불변인 것이 변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 듯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허나 두 번째 문제는 어렵지 아니하게 의문이 풀린다. 즉 전체의 총량으로서는 불변이나 각각의 에너지 작용으로서는, 즉 개별적으로는 변한다는 것이다. 즉 “따로 또 같이”로 이해하면 될 듯 하다. 즉 따로 따로는 변하며 전체로는 불변이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따로 따로 라고 말로 표현하긴 하였으나, 에너지가 만약 생각이 있다면, 스스로들을 따로따로라고 여기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사람이 늙어서 죽으면, 스스로는 죽는다고 여기겠지만, 에너지 차원에서는 죽는다고 이야기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에너지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혀 지식이 없으며 그저 어느 날 우연히 열역학 제1법칙을 보았기에, 그것에다가 맞추어서 비유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 이므로, 위의 에너지에 관련한 여러 이야기 중에서 과학적으로는 틀린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것을 밝히고 이야기를 풀어 가겠다. 에너지 입장에서는 변해갈 뿐인데, 이것이 에너지가 아니고 질량화 하여서 개체가 되면 이러한 개체는 “변한다는 것”을 “죽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이유는 현상의 모든 것들은 변한다. 모두 변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아니할 뿐이다. 모든 변하는 것들은 스스로 생멸을 짓는다고 여기며 그것이 바로 생노병사의 고통이다. 불생불멸자체 불변자체가 변해갈 뿐이며 생멸을 짓는 겉의 모습을 띠운다. 즉 변하는 것 자체가 불생불멸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허나 우리는 불생불멸을 모르기에 그것을 죽음으로 받아들인다. 이유는 스스로 개아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에너지를 마치 본래마음이라고 이야기 한 듯 하여서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에너지는 본래마음의 “작용”일뿐이기 때문이다. 헌데 “작용”마저도 불생불멸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자 다시 한번 열역학 제1법칙을 확대 비유하여서 나열하여 보겠다. 불생불멸, 불변- 공(空), 도(道), 일(一), 참나, 본래마음, 1 생멸, 변하는 것- 색(色), 명(名), 다(多), 개아(個我), 마음, 2 3 4 위와 같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생멸은 본디 없으나 겉의 모습은 변하는 것이 마치 개아로서는 생멸(生滅)을 짓는 듯 하게 보이기 때문에 “생멸”이라고 썼다. 즉 불생불멸이 생멸이요, 불변이 각각(我)으로 볼 때는 변하는 모습이라고 한 것을 위에 대비하여 본다면 아래와 같다. 색(현상자체)이 바로 공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즉 변하는 것 자체가 불변이요, 생멸을 거듭하는 것 개개들 자체가 모두 불생불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또는 변하는 것들만 있다는 것은 필경 변하지 아니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또는 변하지 아니하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있음으로서, 모든 것은 변할 수 있으며 변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변하는 것들이 존재하려면 변하지 아니하는 그 무엇이 존재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는 변하지 아니하는 고정불변의 그러한 실체는 겉모습으로는 늘 변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생멸이 있으려면 반드시 불생불멸이 존재 하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불생불멸이 없다면 우리의 종교나 마음공부는 종착역이 없는, 허무한 공부들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유로 누군가가 삘리리리 하고 피리를 분다. 그 피리에서는 “소리”가 나온다. 그 소리를 한번 색(色)이라고 해보자. 또한 그 피리소리에서는 동시에 “공기”도 나온다. 공기 없이 “소리”만 나올 수는 없다. 그 “공기”를 그저 비유로서 공(空)이라고 해보자(비유일 뿐이다. 공기는 공의 작용이다.) 이 “공”은 마음이 없는, 죽어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순수의식으로서 온전히 “깨어있음”이다. 자 소리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해보자. 그러할 때 그 “소리”는 아름다운 음률을 내어 놓고 나서는 죽는다고 여길 것이다. 소리는 잠시 후에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헌데 그 소리가 자기가 “소리”인 것만이 아니고, 피리를 불 때 “공기”도 같이 나간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공기”가 되었다면 그는 죽는다고 여기지 아니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안과 밖으로 온통 “공기”만 존재하며, “공기”외에는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공기만 있는 곳에서 가보아야 어데를 갈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공기”에는 형체가 없다. 형체가 없는 것은 무한대이건 무한소이건 매한가지이다. 공간개념이 아니라고 이미 책 앞쯤 어디에선가 이야기를 하였다. 형체 없이 깨어있는 것은 불생불멸이다. 그것의 표현인 형체 있는 것은 모두 변한다. 소리와 공기를 따로 갈라놓을 수 있을까? 둘을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우리는 “소리”와 “공기”라고 둘로 분리 하여서 이야기 할 수 있으며, 또한 둘의 서로 다른 점을 개념으로 이야기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둘은 다른 것이다. 즉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것이다. 이것이 불일불이(不一不異)이다. 즉 하나도 아니요 다르지도 아니하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허나 반야심경에서는 불일불이가 아니고, 불이즉일(不異卽一)이라고 이야기 되어진다. 즉 “다르지 아니하며 온전히 하나다”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위에서 한 이야기를 요약하여 본다면, 색=공이며 공=색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도덕경(道德經)이라는 책에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 이라는 대목이 있다고 들었다. 즉 도덕경의 도는 바로 불교의 “공”을 말함이요, 덕은 “색”을 말함이다. 즉 “도”는 “혜”가 되며, “덕”은 “지혜”가 된다. 즉 “도”는 온전한 “깨어있음” 또는 “전체”가 되며 “덕”은 현상에서의 쓰임인 “행위자 없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또는 “도”는 “주체”요, “덕”은 “쓰임”이 된다. 즉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 되는 것이다. “응당 머무는바 없이 마음이 일어난다.”처럼 어디에도 집착하는 마음 없이, 장애 없이 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쓰여 진다는 것이다. 작위(作爲)적이지 아니하며, 바라는 것도 없으며, 아무러한 의도 없이 마음이 일어나며, 그러하게 쓰여 진다는 것이다. 도가도 비상도.......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들었다. “도가 도이려면 늘 도이면 안 된다. 명이 늘 명이려면 늘 명이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명(名)이란 “이름자”이다. 이름자라는 것은 “현상”을 말한다. 그러므로 “도”라는 것은 근본의 무엇이고, 명이라는 것은 세상전체를 말한다. 위의 해석을 “열역학 제1법칙”과 연계하여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도가 도이려면 항상 도여서는 안 된다”라는 것은 “도가 도이려면 항상 명의 상태로 있게 된다.”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불생불멸이 불생불멸이려면, 항상 불생불멸이어서는 안 된다.” 즉 “불생불멸이 불생불멸이려면, 항상 생멸의 상태로 있게 된다.” 또는 “불생불멸의 겉모습은 늘 생멸을 짓는 것으로 보여 진다.” 즉 도가도 비상도는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도가 도이려면, 항상 명으로 있게 된다. 또는 도가 도이려면 항상 명의 상태여야 한다.” 또는 “도가 도이려면 항상 명이 있어야 한다.”등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명이 명이려면, 항상 명이어서는 안 된다.” “현상이 현상이려면, 항상 현상으로 있어서는 아니 된다.” “현상이 현상이려면 항상 현상만 있다면 현상이 있을 수 없다.”즉 “현상이 현상으로 늘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현상이 아닌 그 무엇 즉 도가 있어야지만 현상이 늘 현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요약한다면 “도가 도인 것은 명의 상태로 보여 지기 때문이며 비록 겉모습은 명의상태로 보여 지지만, 그것은 기실 도이다.” 또는 “도가 있다는 것은 필히 명이 있다는 것이요, 명이 있다는 것은 필히 도가 있다는 것이다. 헌데 도는 명의 상태로 존재하며, 그 명은 바로 도 자체이다.” 이러하게 보면 될 것이다. 즉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은 반야심경으로 보았을 때 “색즉시공 공즉시색”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색즉시공은 색이 바로 공이라는 이야기요 공즉시색은 공이 바로 색이라는 이야기다. 즉 색즉시공은 현상자체가 바로 본래마음이요, 본래마음자체가 바로 현상으로 나툰 것이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또는 “도는 도만으로서 있을 수는 없으며, 늘 명으로 표현되어진다. 또한 명이 있다는 것은 명으로서만 존재할 수가 없으며, 그 명자체가 이미 도이다”라고 보아도 되겠다. 사실은 모두 같은 말인데, 이해를 돕기 위하여 이러하게 저러하게 여럿으로 표현해 본 것이다. 천부경에 시작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되어서 마지막 구절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해석하여 본다면 1.하나로 시작되었다고(비롯되었다고) 하지만, 하나로 시작되어진 것(비롯되어진 것)은 아니다. 2.하나로 시작됨이 없이 시작 되어진 것이다. 등으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둘 다의 뜻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시작도 끝도 없다”에서 보듯이, 시작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즉 불생불멸이란 단어 뜻에서 보듯이 “불생”이므로, 생겨난 적이 없다는 뜻과 같을 것이다. 허나 일시무시일이란 말은 어쩐지 뉘앙스가 무시(無始)와는 조금은 뜻에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지? 즉 무시라는 뜻도 있지만은 그 외에 1번과 같은 뜻도 있다고 보여 진다. “공”이라는 근본의 “하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공과색이 별개의 것이 아니므로 “공”하나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시작도 없이 공과색이 한 묶음으로 있어 왔다는 이야기다. 일종무종일을 살펴보면 마찬가지로 “하나로(근본으로)돌아감으로써, 모든 것을 마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러하게 근본으로 끝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근본”만이 있는 그러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만약에 “색”과 “공”이 별개의 것이라면 색은 영원히 “공”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색”과 다른 별개의 “근본, 또는 공”이 있다면 색도 반쪽이요 “근본”이라 불리어지는 것도 색과 별개의 반쪽짜리의 무엇이기 때문에 이름만 “근본”이지, 그것은 정말 근본일수가 없는 것이다. 전체라는 것은 반쪽짜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로 끝난다고 말은 하지만, 색이 사라진 “공”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끝없이 무종일(無終一)하게 되는 것이다. 허나 모든 색들은 일(一)로 일단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애초의 근본이 바로 “하나”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一)에서 2, 3, 4 등이 파생했으니 얼른 “1”로 돌아가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해서 근본으로 돌아가 보니, “아하 2,3,4 모두가 근본 이었구나”로 귀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로 돌아가기 위하여 “근본은 하나이다.”라고 밝힌 것이며, 허나 그러한 근본이 근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늘 현상으로 보여 지기 때문에 무시일(無始一)이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하나로 시작한 것이 아니며 현상자체가 근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몰랐을 뿐. 그러므로 “일종”이 되면 이제 전체가 된 것이다. 허나 “무종일”한 것은, 전체가 되고나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자체가 모두 전체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화두에 만법(萬法)은 어디로 귀일(歸一)하며, 그 하나는 어데로 돌아가는가? 하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즉 만법은 현상전체인데, 이 모든 세상은 어느 하나로 돌아가는가? 또는 이 하나가 무엇인가? 또한 이 하나는 다시 어데로 돌아가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현상은 “공” 하나로 돌아갈 것이며, 이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고, 이 “공”은 다시 만법(色, 현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바로 모든 색은 공으로 돌아가고 또한 공은 다시 색으로 돌아온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색즉시공은 말 그대로 색=공이라는 이야기다. 허나 그러하다면 색즉시공 한마디로 끝이 나야한다. 헌데 똑 같은 소리이면서 앞뒤만 바꾸어서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바로 뒤이어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의 뜻은 바로 색=공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의 뜻은 모든 색들이여 “공”까지 가보아라,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색까지 가보아라”로 볼 수 있다. 사실 온전한 공심(空心)이 되면, 다시 색까지 나와 보라고 하지 아니하여도, 공색이 둘이 아님을 알고 되게 되어있다. 허나 “공”의 온전한 체험이 없을 때, “공. 공”하는 소리를 들으면, 필경 “공”을 머리로 짓기가 십상일 것이다. 그러할 때 위와 같이 다시 공즉시색이라는 이야기로 진정하게 “참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색즉시공의 공삼매(空三昧, 텅빈삼매)가 있으며, 또한 공즉시색의 색삼매(色三昧, 외연삼매)가 별도로 있다. 이 둘은 모두 무심삼매이지만, 상태는 다르다. 공삼매는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진 상태이다. 색삼매는 내가 사라진 상태에서, 세상이 청정하게 드러나는 상태이다. 나가 없으므로 세상전체가 “나”인 것이다. 위에서 불생불멸을 이야기 할 때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할 수도 있다. “당연히 생겨나지 아니하였으니 멸할 것도 없지. 그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까 당연하지” 허나 열역학법칙에서 보았듯이 에너지는 없는 것이 아니다. 에너지가 우주전체이다. 생겨난 적이 없으므로 없는 것이 아니며, 현재 분명히 있는 것을 과학은 생겨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즉 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도 있을 수가 없다. 현상의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따라서 결과가 있다. 허나 불생불멸은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무엇”이 결코 아니다. 이와 같이 “공”이란 아무것도 없는 무엇이 아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공”이며, 아무것도 없으니까 당연히 “불생”이지.......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공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공=색 이라는 말은 바보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불생불멸의 “공”은 “온전한 깨어있음” 또는 형체는 없지만 “온전한 혜”이다. 공의 작용에 불과한 에너지는 눈으로 볼 수도 귀로 들을 수도 입으로 맛볼 수도 몸으로 느낄 수도 코로 냄새 맡을 수도 또한 마음으로 알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에너지가 쓰임으로 변하였을 때만이 “에너지”는 알 수 없어도, 그것이 발현되는 무엇으로 우리는 에너지를 알 수가 있다. 예를 들면 에너지가 빛으로 전환되었을 때라든지 동력으로 바뀌었을 때라든지, 전기로 바뀌었을 때라든지 등등의 겉모습 있는 무엇으로 전환되었을 때만이 알 수가 있다. 그와 같이 본래마음이란 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 맡을 수도 들을 수도 맛볼 수도 나아가 마음으로 도저히 인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마음의 작용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움직이는 마음으로 고요한 마음을 보고자 듣고자 등등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움직이는 마음”이 온전히 멈추어져서 고요한마음이 되었을 때만이, 바로 그 고요한마음하나뿐임을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천부경으로 돌아가서, 중간쯤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즉 쓰임은 변하며, 그 변하는 쓰임들 자체가 바로 “움직임이 없는 근본”이라는 이야기다. 즉 현상전체, 세상만물은 쓰임으로써 늘 변하는 것이다. 허나 그 변하는 것들 자체가 바로 움직임 없는 근본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부동본이란 부동심(不動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즉 전체의 고요한 마음이다. 움직이지 아니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본래마음이다. 허나 그냥 마음은 움직인다. 즉 동심(動心)이다.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변한다는 것이다. 즉 용변부동본이라는 이야기는 “움직이는 마음”이 바로 “고요한마음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또는 열역학 제1법칙처럼, 변하는 것 자체가 불변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움직이는 마음은 움직이는 마음이지, 어찌 고요한마음이 될 수 있을까?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면 움직이는 마음이 바로 고요한 마음이 된다는 이야기다. “응당 머무는바 없이 마음이 일어난다.” 금강경에 보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 머무르지 말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대목이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다. 즉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소리, 냄새, 맛, 생각을 일으키는 모든 대상들 그 어떠한 것에도 마음을 두지 마라는 이야기다. 즉 집착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왜 그런가 하면은 모든 것은 변하기 때문이다. 변하지 아니 하는 것은 현상에선 찾을 수가 없다. 헌데 우리는 변하는 것을 집착하여서 변하지 아니하게 하려한다. 어떠한 색에 마음이 머물러서 집착하게 되면, 그것을 변하지 아니하게 하려고 무던히 노력한다. 종래에 늙어서 변하여 죽어가는 것을 죽지 아니하려고 즉 불변하게 하려고 집착을 하게 된다. 허나 과학이 이야기 하였다. 모든 것은 변해갈 뿐이라고............ 즉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변하지 아니하게 하려는 집착은 모두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니 “괴로울”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해가는 제 현상에 “마음을 머물러서 집착과 저항”을 하지 아니 한다면, 비록 세상은 움직이고, 그것이 움직이는 마음에 의하였더라도, 그것은 움직이는 마음이 아니며 고요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 왼쪽과 같은 점이 고요라고 한번 가정하여보자. ........................................> 고요한마음인 사람은 이러하게 고요한마음을 이어서 움직이는 마음을 낸다. 이것이 바로 “응당 머무는바 없이 마음이 일어난다.”가 되겠다. --------------------> 움직이는 마음인 사람은 실선을 쭉 그어서 자기가 계속 움직이고 있으며, 그 움직이는 마음이 “나”라고 여긴다. 그 실선이 점선이 모여서 된 것이라고는 여기지를 아니한다. 그러하므로 세상만물에 대하여 마음이 머무르지 아니하고 또한 내면의 대상들에 대하여서도 마음을 머무르지 아니하면 본래마음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이러할 때 본성은 “혜”요 쓰임은 “지혜”가 되는 것이다. 즉 고요한마음에도 움직이는 마음에도 머무르지 아니하여 온전한 부동심인 것이다. 이러할 때 “용변부동근”이듯이 “동심부동심(動心不動心)”이 되는 것이다. 일즉다(一卽多)와 다즉일(多卽一) 또한 같은 이야기가 된다. 공이 만법의 색이요. 만법만색이 바로 “공”이다. 참나의 나툼이 개아요, 개아가 돌아갈 길이 바로 참나이다. 마음이 바로 본래마음이요, 본래마음이 바로 마음이다. 여기서 중생이 붓다요, 붓다가 중생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을 것이며 또한 “번뇌가 보리이다”는 이야기도 나왔을 것이다. 허나 마음이 본래마음이긴 한데, 마음이 만물에 집착을 하고 저항을 하게 되면 그것은 본래마음의 씨앗만 있을 뿐 필경 번뇌이다. 마음에서 탐진치를 빼어내서, 개아가 무아가 되어야만, 응무소주 이생기심하게 될 것이며 만물에 저항과 집착을 하지 아니하게 될 것이다. 그러할 때 번뇌가 없는 온전한 본래마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원각경에서 붓다는 "중생이 부처요, 번뇌가 보리이니 그러므로 열심히 닦으라.”고 하셨다. 뒤에 “열심히 닦으라.”는 말씀이 없었다면 “중생이 부처요, 번뇌가 보리다.”라는 이야기는 “반쪽짜리”가 되었을 것이다. 여적 열역학 제1법칙에 비유하여 이야기 해온 것은, “현상자체가 본래마음 이니 닦을 것 없다”라는 결론을 짓기 위하여서가 아니다. 본래가 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본래가 무엇이냐를 이해하고 그러하게 되고자 하는 목적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는 그렇게 되기 위하여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이 중요하다. 위의 설명 등은 본래가 무엇이냐 또는 깨달음의 목적이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였을 뿐이다. “우리가 본디 전체이다. 또는 근본이다.”라는 이야기는 바로 본래 무엇이며 무엇이 되겠다고 마음공부를 하는가의 목적 부분이다. 허나 “본디 우리가 전체이다”는 선언이 전체자(全體自)가 되게끔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하게 되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번뇌가 보리일수는 없다. 번뇌가 보리라는 이야기는 다른 말로 해본다면 “고통이 참 행복이다.”라는 이야기와 다르지 아니하다. 과연 우리는 “고통이 행복이다”라고 여길 수가 있는가? 고통은 행복이 아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고통을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참 행복이 되고자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리가 되신 분이 보기에,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이란 본디 없었던 것이다. 또한 컴퓨터의 이진법인 0 과 1처럼, 세상을 “씨줄 날줄”로 지어가려면 고통과 행복, 선과 악 등이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되며, 그에게는 그 둘을 모두 떠나 중도이기에 사실 번뇌라고는 있을 수가 없다. 보리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청정할 뿐이다. 그러기에 그런 분 눈으로 볼 때에 세상 모두는 잘못된 것이 없으며 그 자체가 모두 보리인 것이다. 과연 보리 된 이가 번뇌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하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번뇌인 우리가 “번뇌는 보리다.”라고 하면서 아무러한 노력을 하지 아니 한다면 그것은 그르치게 될 것이다. 허나 “번뇌가 보리다.”라고 하면서 “탐진치”를 마음에서 빼어내 간다면, 그것은 잘 가고 있는 것이다. 중생이 붓다라고 하면서 아무것도 아니 한다면 그것은 번뇌자체일 것이다. 중생은 붓다의 마음에다가 탐진치와 개아를 더 한 “번뇌의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그 모든 것을 빼어내야 할 것이다. 붓다와 중생이 본디 불성이라고 하신 것은, 중생은 빼어낼 것을 빼어 내면은 바로 붓다가 된다는 것을 펼쳐 보이기 위한 것으로 보여 진다. 즉 중생이 본디 불성이 아니라면 아무리 마음공부를 다하여도 붓다가 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차적 설정일 뿐이며, 그러한 말을 머리로 알았다고 하여도 붓다가 된 것은 아닐 것이다. 선이란 “잘 포장되어진 악”과 다르지 아니하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였다. 마찬가지로 행복이란 “잘 포장되어진 고통”이다. 고통과 행복은 서로 의존적인 관계이다. 고통이 있을 때만이 행복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헌데 붓다는 고(苦)와 락(樂)의 중도를 이야기 하였다. 여정은 고통에서 행복 쪽으로 많이 가고, 가도 가도 행복한 속에 고통이 오기 때문에, 결국은 불고불락(不苦不樂)으로 가서, 온전히 청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청정심이란 말로 표현 불가이며 지복이란 단어로 표현할 수 없지만, 하는 수없이 지복(至福)이라고 표현 되어지는 것이다. 듣기로 붓다가 네 가지의 중도를 말씀하셨다고 한다.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억하기로 선과악(善惡)의 중도(中道) 고와락(苦樂)의 중도 무와유(無有)의 중도 단과상(斷常)의 중도 선과악은 여러 번에 걸쳐서 이야기 하였다. 악에서 선으로만 가도 좋은데 어찌하여 종래에는 “선”이라는 생각까지 버려야 하는지를 앞에서 많이 이야기 하였다. 고에서 락으로 가는 것 또한 그와 같다. 락으로 가도 가도, 그 락이라는 것이 고에 의존하여 있는 것이므로, 참으로 늘 락 상태일 수가 없기 때문에 락마저 빼어내고서는 그제야 온전한 청정심이 되는 것이다. 본래마음은 형체가 없다, 그러므로 “無”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다. 현상은 형체가 있다. 그러므로 “有”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다. 허나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라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밝혔으니 “무와 유는 다른 것이다.”라는 분별은 진실이 아니다. 또한 실상과 현상의 이야기를 그만 두고라도, 현상에서 “무”이네 “유”이네 하는 모든 신념의 싸움은 단견에서 비롯된다. 실상(實相)은 항상 함이요 현상은 겉모습은 소멸함으로써 단멸의 모습을 띄운다. 우리가 죽어서 다시 오더라도 이 모습 그대로는 아니듯이 겉의 모습은 한번 변하면 그것으로 끝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과상은 같이 존재하며, 단이 바로 상이요, 상이 바로 단인 것이다. 1을 한번 (1)로 표시해보자 그리고 2,3,4 등등도 같은 방법으로 아래에 표시해보겠다. 1 (1) 2 (11) 3 (111) 4 (1111) 5 (11111) 즉 1이 근본이요 2,3,4,5가 현상이며 겉모습으로 천변만화 변한다고 하여보자 우리는 어렸을 때 산수를 배우면서 사과를 1개와 2개를 합치면 3이라고 배울 때, 숫자 아래에 사과모양의 그림이 있었고, 그 개수가 다르게 그려져 있었다. 그러하듯이 위의 숫자들에서 괄호안의 (111) 등등을 보게 되면 단지 3은 3이 아니요, 그저 1이 세 번 배열되었을 뿐이다. 허나 (111)과 3은 전혀 다른 모양이다. 즉 근본은 같으나, 근본이 여럿인 듯이 나투어 지면 모양이 다르게 되어진다. 그러고 나면은 3이란 1이 셋이 모인 것이라는 것을 왕왕 잊게 된다. 그저 3이라는 모양에만 빠지게 된다. 그와 같이 우리는 색의 근본인 “공”은 잊은 채로, 색의 겉모습에 빠져있는 것이다. 색에 겉모습에 빠져있는 한 근본인 “공”은 있는데도, 없는 것이나 매 한가지가 된다. 그러므로 붓다는 “색성향미촉법에 마음을 머무르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보이는 사물의 겉모습에 빠져버리면 “공”을 잊게 되고 듣는 사물의 겉모습에 빠지면 “공”을 저버리게 되고 이와 같이 어디에건 겉모습에 빠지면 근본이 잊혀진다. 그러므로 제상(諸相)이 상(相)이 아님을 알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금강경에서 설해졌다. 만물의 겉모습에 빠져서, 모든 것이 실하다고 여긴다면, 그것들의 “근본”은 보고 될 수가 없을 것이다. 이제 반야심경으로 돌아가 보겠다. 제목이 마하반야바라밀다경 이다. 마하란 대소(大小)의 “큰”이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마하란 물론 크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전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허나 작은 것과의 비교의미인 “전체”가 아니다. 앞에서 이미 무한대(無限大)=무한소(無限小) 라고 이야기 하였다. 무한소로 가서 원자 전자 더 작게 가면은 형체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것이 무한소이다. 무한대로 나아가면은 우주 전체로, 또한 우주 밖으로 무한으로 나가다 보면 형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무한대이다. 즉 무한소와 무한대라는 말로 대소를 표현하긴 하였지만은 사실은 면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형체가 없기 때문에 “작다 크다”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만 “공”이라고 이야기 되어진다. 허나 “공”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완전한 각성”이다. 그러므로 “마하”란 것은 대소의 의미가 아니다. 허공성은 전체이다. 허공은 “작은 허공”과 “큰 허공”을 가를 수가 없다. 형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바로 “전체”이다. 다만 “허공”은 마음이 없다. 허나 “반야” 또는 “본래마음”은 완전히 깨어있는 “각성”이다. 반야란 “혜” 또는 “지혜”로 해석되어진다. 반야는 “혜”이며 이것은 마음의 “주관과 객관”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즉 마음이 멈추었다는 것이며, 또는 생각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무심이라고 이야기 하는 상태이다. 무심은 찧고 빻은 마음이 모두 사라졌지만, 마음이 없어서, 아무것도 없거나 혼절한 그러한 상태가 아니며, 본래마음의 상태가 바로 무심이다. 바로 본래마음 상태, 온전한 깨어있음이 바로 “반야”이며 “혜”이다. 그러하면 “지혜”라는 것은 무엇인가? 지혜에는 주관과 객관이 있다. 분별할 수가 있다. 허나 지식이랑 다른 것은 지식은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아니며, 세상의 모든 것에 마음이 머무는 것이다. 즉 지식이란 개아가 있으며 탐진치가 있어서 세상 모든 것에 저항과 집착을 하는 마음이 바로 지식이다. 지혜란 똑 같이 주관과 객관은 있으나 개아가 없으므로 탐진치가 없다. 그러므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으로 세상 어디에도 저항과 집착을 하지 아니하는 마음이다. 이것이 바로 행위자 없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또는 도덕경의 “덕”에 해당하게 되는 것이다. 즉 색즉시공으로 “공”까지 가면은 “혜”요 다시 공즉시색으로 “색”까지 가면은 그것이 “지혜”가 되는 것이다. 즉 늘 “혜”상태에서 “지혜”를 쓰임으로 쓴다. 요약하면 지혜에는 개아가 없으므로 시시비비가 없다. 지식에는 개아가 있으므로 시시비비가 있다. “바라”는 “건너다”라는 뜻이라고 들었다. 전문적으로 반야심경을 해석한 글들을 본 것은 아니므로 통론에 차질이 없으나, 단어 해석에는 미흡한 점이 있을 수도 있으니, 단어들이 맞는지는 다른 책을 통하여 보시면 좋을 수도 있겠다. “밀다”는 “마음”이라고 들었다. “경”이란 완전자들께서 하신 말씀이겠다. 그러므로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은 “본래전체인 혜로 건너가는 마음 경”이 되겠다. 즉 “전체자가 되는 마음 경”이라고 보아도 되겠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관자재라고 쓰여 있다. 즉 “관이 스스로 있다”라는 이야기다. “스스로 있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것에 의하여 생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 말은 “실체, 실상”이라는 이야기며, 원인이 없다는 것이다. 즉 “자재”라는 말은 “스스로 절대 유일”이라는 이야기다. 종교 식으로 이야기 한다면 스스로 유일자라는 이야기가 된다. 관은 앞서서 “봄”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즉 “보는 자 와 보여 지는 대상”이 “하나”가 된 상태가 바로“관”이며 “봄”인 것이다. 인도나 네팔의 사원에 스투파라고 “눈과 눈썹”만 그려진 그림들이 있다. 세상을 보는 깨어있는 “눈”이다. 허나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세상과 하나 된 “봄”만 있는 상태의 온전한 깨어있음을 표시한 것이 바로 그 “눈”이다. 관자재보살은 본디 또 다른 이름이 “관세음보살”이라고 한다. 헌데 반야심경에서는 왜 “관자재”라고 하였을까? 여기서부터 이미 풀어나갈 경의 의미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경”이란 유일자가 말씀하신 내용이다. 그러므로 “관자재” 즉 “관 유일자”가 이제부터 “유일자” “전체”가 되는 방법을 설한다는 것이다. 또는 그러한 경을 설하는 이가 “유일자”라는 이야기도 되겠다. 또한 “관자재” 뜻 그대로 “관”이 “유일자”이며 “전체”라는 이야기다. 즉 “봄, 깨어있음”이 전체(자)요 유일(자)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 반야로 건너가는 마음을 깊이 행할 때 반야로 건너가는 마음을 깊이 행하는 것이 무엇일까? 무슨 마음일까? 반야로 건너가는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일까? 이것은 “무심삼매”로 보면 된다. 계정혜 삼학에서 보듯이 붓다는 계율과 참회로써 일단 “바른생각, 선”이 되라고 하셨으며, 그 다음에는 팔선정이라고 부르는 팔삼매를 “정”으로써 하라고 하셨으며 그리하면 “혜”가 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혜”로 건너가는 마음을 깊이 행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팔삼매 중에서 무심삼매(無心三昧)를 깊이 행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요약해보면 “반야가 되기 위하여 깊이 무심삼매를 행할 시에”가 되겠다. 그러므로 온전히 삼매에 들어서 혜가 다 드러난 상태는 아니며, 진행 중인 상태라고 보면 될 듯하다. 조견오온개공 조견(照見)이라는 말은 견(見)이랑은 또 다르다. 견은 위에서 이야기 하였듯이 “나”가 무엇을 “본다”이다. 허나 조견 즉 “비추어 보여 졌다”라는 뜻은 “나”가 무엇을 “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무엇이 본성에 비추어서 보여 졌다는 것이다. 즉 “주체”가 “개아”인가 “본성”인가의 차이가 견과 조견의 차이다. 개아=견(見) 본성이 많이 드러난 상태=조견(照見) “나”가 보는 것은 모두 겉모습에 빠져버린 “거짓”이기가 십상이다. 허나 개아의 “나”가 본 것이 아니고, 본성이라는 바탕에 비추어져서 보여 진 것은 사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리로서 “아하 오온은 전부 공한 것이 로구나” 하고 알았다는 것이 아니다. 본래마음인 혜에 비추어지기를 “오온은 전부 공이로구나”가 된 것이다. 여기서 “오온”이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하는 것이다. “색”은 “몸”을 말하며 “수”는 “느낌, 감각”을 말하며 “상”은 “인식작용”을 말하며 “행”은 “생각구성, 의도, 경험”등을 말하며 “식”은 마음, 생각을 말한다. 그러므로 요약해본다면은 “몸과 마음이 전부 공하구나. 또는 몸과 마음의 바탕이 공이로구나“하고 본래마음에 비추어져서 보여 졌다는 뜻이 된다. 흔히 우리는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하다고 하면은 무엇인가 부정적으로 듣기도 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공”이라면, 물론 부정적으로 들릴 것이다. 허나 “공”이 만약 전체라면 상황이 틀릴 것이다. 그러할 때 몸과 마음이 “공”이로구나 한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이 몸과 마음이 “공”이로다 에는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처음에는 약간의 부정적인 견해로 받아 들여서 모든 것을 버리는 길로 가도 될 듯 하다. 허나 종래에는 “공”하다는 것이 나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축복의 소리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일단 밝혀본다. 이유가 지금 개아가 오온이 “공”하다고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성에 비추어져서 알고 보게 된 사실이 “오온이 공”이라는 것이다. 즉 “본성”이 없는 것이 아니며, 있다는 것이다. 만약 비추어질 바탕이 없다면 어디에 비추어 질수 있다는 이야긴가? 그러므로 오온이 공한 것이 비추어지는 “그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다. 조견과 관에 대하여서 잠시 이야기 해본다. 조견은 본성에 비추어져서 보여 진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이것은 본래마음이 많이 드러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더러 어떤 선생들이 “맑은 하늘에 구름(생각들)이 점점이 떠다닌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할 때 맑은 하늘이 본래마음이며 구름이 바로 아직 개아의 번뇌마음이다. 이것은 생각으로 떠다니는 구름생각들을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맑은 하늘 즉 본래마음에 구름들이 비추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이가 무엇이냐 하면은 개아가 주체이냐 본래마음이 주체이냐의 차이다. 즉 본래마음이 많이 드러나면 “조견”이 되며, 개아가 주체일 때는 “견”이 된다. 깊은 잠에서 깨어있을 때에도 이러한 “조견”상태이다. 깨어 있다면 그것은 오롯이 본래마음일터인데 어찌 조견이라고 묻는다면, 여전히 간혹 조견되는 대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하게 자면서 깨어있음이 깊어지면 너무도 고요하여 깨어있는지도 모를 때에 간혹 쓰윽 하고 지렁이처럼 작은 번뇌가 스칠 때에 그것이 조견이 된다. 그것에 의하여 오히려 무엇인가가 깨어있구나 하고 알정도로 고요하기도 하다. 그러한 지렁이같이 작은 번뇌는 아주 작아서 생각으로 발전되기 전 단계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면은 본래마음에서 생각으로 나올 때의 애초의 한 씨앗이 조견되기도 한다. 그러한 씨앗은 조견이 된 이유로 생각으로 발전되지 아니 한다. 잠이나 생시에서 마음의 번뇌가 몸의 번뇌로 쓰윽 지나가는 것들이 조견되는 것은 “의식”으로는 알아차리지 못 할 정도의 작은 것들이다. 그러한 것들은 아뢰야식에 남은 미세한 번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자면서도(생시에도) 늘 긴장하고 있다. 그러한 것들이 잠 속에서도 깨어있으며 조견 되어지면 서서히 사라져 가기 시작한다. 잠에서 휴식이 되기 시작할 때에, 즉 되었다가 아니 되었다가 할 때에는 “관”과 “조견”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조견”은 일심으로부터 무심까지 벌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일심에 들면 늘 일심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무심 네 가지 중 어떤 것이든지 들면 늘 그러한 상태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늘 그러하다면 이미 전체이다. 늘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등차의 삼매가 있는 것이며, 또한 비상비비상처에서 마저도 오락가락 하기 때문에 “비상”과 “비비상”이 있는 것이다. 그나마 비상비비상처에서도 늘 비상비비상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개아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할 때 개아로 돌아오면 완전히 개아상태로 돌아오지는 아니하며, 조견상태가 벌어진다. 조견이란 말이 의미하듯이 아무리 본성이 거의 드러났다고 하여도 개아가 남았기 때문에 그러한 점점의 생각들이 본래마음에 비추이는 것이다. 즉 아직도 빼어내야 할 “개아 또는 의도 작위”가 있다는 것이다. “관”은 말 그대로 “봄”이다. 또한 “각성자체”이다. 또한 오로지 “하나”이다. 거기에는 “보는 자”와 “보는 대상”이라는 두개의 “분리 상태”가 없다. 비추어지는 바탕의 본래마음과 비추어지는 점점의 구름도 없다. 그냥 청정뿐이다. 관상태가 되면 자나 깨나 마음은 올올이 각성(관상태)되어 온전한 지복과 청정심이다. 동시에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미세 두려움이 소멸하며 세포 하나하나가 올올이 개화(開花)하고 각성하여 지복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관자재”와 “조견오온개공”으로서 “관 과 조견”을 다른 말로 쓴 것이다. 즉 “관유일전체”가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 즉 깊이 삼매행을 하여서 완전히 전체가 드러나려고 할 때에(즉 아직 완전히 전체가 드러난 상태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많이 드러난 본래마음에 “몸과 마음의 바탕이 모두 공이로구나”하는 사실이 비추어졌다는 것이다. 즉 본래마음이 있고 그러한 비추어진 대상이 있는 것이다. 누구나 삼매에 들어갈 때에, 이러하게 몸과 마음이 “공”이로구나 하고서 들어야 한다. 전체상태가 되려고 하는데 개아(몸과 마음)가 “나”라고 여긴다면 이미 그것 자체가 모순이 된다. 도일체고액 일체의 고통과 액을 넘어섰다는 이야기다. 또는 모든 고통과 액을 끊고서 넘어섰다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즉 무심삼매에 깊이 들어갈 제에 몸과 마음 일체가 바탕이 “공”이로구나 하는 것이 본래마음에 비추어져서 즉 혜에 비추어져서, 일체의 고통과 액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의 “공”은 그러므로 부정적인 “공”이 아니다. 일체의 고액을 넘어선 “공”이 어찌 아무것도 없는 “공”이겠는가? 즉 몸과 마음이 모두 “공”하다고 본래마음에 비추어졌으므로, 늘 우리는 본래마음인 것을 여실히 알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고액을 넘어서서 드디어 무심삼매에 들었다는 것이다. 즉 혜에 들었다는 말이며, 말로는 “들었다”고 표현을 하였지만은 사실은 이제 “전체”가 드러났다. 즉 몸과 마음이 “나”가 아니었으며, “진정한 나” 즉 “전체의 나”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사리자여 듣기로 사리자가 궁금하던 것을 붓다에게 질문하고자 하였으나, 붓다는 “삼매”에 드셨으므로, 관자재보살에게 묻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관자재보살이 대답한 것이 바로 이 “마하반야바라밀다경”이 된다. 이유는 관자재보살은 붓다 제자 중에서도 큰 제자였다고 한다. 부처님이 되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생을 모두 성불시킬 때 까지 성불을 미룬 분들이 보살마하살이라고 들었다. 그러한 분들 중 한 이가 바로 관자재보살이다. 관자재보살이 사리자에게 이 모든 것을 설하고 난 뒤, 붓다가 “삼매”에서 일어 나셨다고 한다. 그러고는 “옳고도 옳도다.” 하시면서 관자재보살이 설한 것을 인정하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 관자재보살이 “사리자여” 하고 부르시는 것이다.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다.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며 공은 색과 다르지 아니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색은 바로 공이며 공은 바로 다름 아닌 색이다. 위의 말을 이야기상으로만 본다면 점점 강조한 것으로 보여 진다. 허나 비슷한 말들을 이러하게 중복적으로 이야기 한 것에는 또 다른 뜻도 있을 것이다. 색불이공과 색즉시공은 해석하여 본다면 같은 말 같다. 다른 점이 없는 듯 하다. 허나 무엇인가 뉘앙스가 다르다. 즉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는 것이다. 큰 뜻은 같으나, 작게는 뉘앙스가 다르다. 단순히 강조법이라면 그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면 족할 듯 하다.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다”와 “색은 바로 공이다”의 차이가 무엇일까? “색은 바로 공이다”라는 말은 직설적이어서, 의심의 여지가 없이 색=공이구나 하고 느껴진다. 허나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다”는 무언가 “다른 것”도 있는 듯한 뉘앙스가 풍기지 아니하는지? 아마도 색이 공이긴 한데 우리 중생들이 열심히 닦지 아니 하면은 결국 중생은 중생일 수밖에 없다는 뉘앙스가 풍기는 듯 하다. 이러한 차이와 함께, 우리가 너무 색에 젖어 있으니 일단은 가벼웁게 이야기 하고나서, 그 다음에 직설법으로 이야기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도 또한 위와 같다. 색=공이라고 밝혔으면 그것으로 끝날 일이다. 헌데 다시 강조법으로 공즉시색을 순서만 바꾸어서 한 번 더 이야기 했을까? 이러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며 그것을 위에서 이야기 하였다. 즉 색이여 공이 되어보라, 그리고 공이여 다시 색이 되어보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색즉시공 공즉시색부터 이하 쭉 나오는 이야기들이 실상의 이치를 말한 듯하지만, 이치뿐이 아니고, 실제로 삼매의 상태, 절차를 모두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이다. 즉 공삼매라는 것은 지관(止觀)중에서 “그칠 지”를 말한다. 모든 생각이 끊어져서 그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즉시색의 “색”삼매는 “관”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무심을 크게 보면 이두가지로 볼 수가 있다. 처음에는 “공삼매(텅빈삼매)”가 되고, 그것이 깊어지면 “색삼매(외연삼매)”가 되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지”가 되고, 다음에는 “관”이 되는 것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중생) 산은 공이요, 물도 공이요 (공삼매, 지, 색즉시공, 색----->공)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색삼매, 관, 공즉시색, 공----->색) 중생이 보는 산과 물은 자동생각으로 보는 것이다. 즉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다. 허나 공삼매를 지나서 색삼매에 들었을 때 다시 세상이 드러나서 텅비어진 마음에, 텅비어진 “눈”에 비추어지는 산과 물은 무심상태에서 비추어지는 것이다. 결코 개아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무심한 눈이라는 창에 대지산하가 청정하게 “비추어질 뿐”인 것이다. 그리고는 더 깊어지면 “봄”상태가 된다. 이러한 “봄”만이 있는 상태, 올올이 전체의 각성만 있는 상태가 바로 “관”이다. 또한 색이 공으로 되라는 것은 “움직이는 마음”들이여 “고요한마음”이 되어 보라는 이야기가 된다. 헌데 처음에 움직이는 마음들이 고요하여지려면 몸도 꼼짝 말아야 하며, 눈동자 역시 꼼짝 말아야 만이 고요한마음이 된다. 그러하여서 일심이 되고, 나아가 더 깊어지면 온전한 “공”인 공삼매(텅빈삼매)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삼매에 들면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진다. 헌데 이러한 공삼매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즉시색으로 다시 세상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는 몸을 움직여도 무심상태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공즉시색”은 움직임에도 늘 고요한마음이 되어있는, 즉 색에서도 “본래마음” 상태가 되는 것이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느낌, 인식작용, 생각구성(경험, 의도), 생각도 또한 이와 같다. 즉 위에서 색즉시공에서 색이란 중의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현상의 모든 것, 즉 만물이 “색”이다. 또한 “개아의 몸” 또한 “색”이다. 그러므로 둘 다 즉 전체가 모두 바탕의 근본이 “공”이라고 이야기 했던 것이다. 아까 위에서 오온(색수상행식)이 모두 “공”이라고 통론(通論)으로 밝힌 것을 다시 각론으로 “색”으로 통칭하여서 밝힌 것이 “색즉시공”이다. 또한 “색”을 이야기 하였으므로 마찬가지로 “수상행식”도 또한 이와 같다고 각론(各論)으로 밝히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왜 통론으로 “조견오온개공”을 밝히고도 다시 각론으로 또 다시 밝히고 있을까? 흔히 “오온이 개공”하다고 하면은 우리는 아마도 허무로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 몸도 마음도 인식도 감각도 생각구성도 모두 공하다니..........이것이 무슨 말일까?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길까?” 하면서 허무로 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다시 밝힌 이유가 “공”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그런 것이 아니며, “색의 근본이 바로 공이고, 공의 표현이 바로 색이다”라고 각론으로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색”을 이야기 하였으므로 색“수상행식”중에서 “수상행식” 또한 근본이 “공”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요약한다면 모든 색(나+세상)=공이다. 지금 분명 “나”도 있고 “세상”도 있다. 그런데 왜 “공”이라고 하느냐면, 지금 있는 “세상과 나”의 바탕은 “공”이라는 것이다. 사리자여 다시 사리자를 부른다. 그 이유를 잘 보자. 관자재보살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에 조견오온개공하고서는 도일체고액을 넘어섰다. 그리고는 “사리자여”하고 불렀다. 그리고는 “오온이 개공”하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밝혔다. 관자재보살이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의 한단원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사리자여”하고 부른다. 이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제 앞선 한 단원을 좀더 자세히 펼쳐서 이야기 하려는 준비 작업이다. 또한 앞에서 사리자여 하고 부른 다음에 이야기한 것이 좀더 “이치적”인 것이라면, 이제 사리자여 하고 부른 다음에는 삼매상태에서 혜가 드러나는 것을 더 자세히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이다. 시제법공상이니 이와 같이 현상의 모든 것(제법)의 근본 바탕은 “공”이니. 또는 “제법(현상)은 공의 상”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즉 실상 바탕근본은 바로 “공”이며, 그것의 표현 즉 상(相)이 바로 현상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둘 다 뉘앙스는 조금 다르지만은 실상은 “공”이며, 그것의 표현인 현상은 바로 상(相) 즉 “색”이라는 것이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다. 즉 현상의 근본 바탕은 “공”이며, 그러한 “온전한 혜”는 생겨나지도 아니하였으며 그러므로 멸하지도 아니한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생겨나지 아니하였으니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위에서 이미 에너지는 생겨나지도 소멸하지 아니하는데, 그 이야기가 우주에 에너지가 없다는,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이미 말하였다. 그러므로 근본바탕인 본래마음 즉 “공”은 죽은 공이 아니며, 완전히 깨어있는 본래마음인 것이다. 이것이 생겨난 적이 없으므로 멸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유가 그 본래마음이 관자재에서 보았듯이 “스스로 있는 깨어있음”이기 때문이다. 불구부정은 말 그대로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아니하다는 표현이다. 방편이기도 하다. 반야가 되려면 현상의 모든 것에 좋아함과 싫어함을 짓는 것을 중도로써 떠나야만 한다. 깨끗한 것에는 집착을 하게 될 것이요, 더러운 것에는 저항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할 때 완전한 중도인 “공”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청정심淸淨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청정심” 되려고 공부를 하기도 한다. 허나 “반야인 공”에는 그러한 “청정심”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헌데 이 말을 잘 새겨야 할듯하다. 진실로 청정하지 아니 하단 말인가? 직설로 말하자면은, 진실로 청정하다. 더러움과 청정함을 떠났기에 진실로 청정하다. 허나 그 상태에서는 “청정”하다는 생각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한 생각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아니하기 때문에, “청정”하다고 이야기 되어지는 것이다. 누군가 “청정자체”가 되었다면 “청정”이라는 생각이나 “청정”이라는 단어도 떠오르지 아니 할 것이다. 청정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는 것은 여전히 “청정”하여지지 아니한 “무엇”이 남아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평화자체”인 사람은 “평화”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아니할 것이다. 평화를 떠올리는 사람은 “평화 아닌 것”과의 비교가 알든 모르든 내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할 때 “평화로운 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증불감은 늘지도 줄지도 아니 한다는 이야기다.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아니한다는 말은 불변이라는 이야기가 되며, 전체라는 것이 성립된다. “공”의 작용인 에너지마저도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아니하며 불변이다. 그러므로 공(空)은 부증불감이다. 시고 공중무색 이와 같이, 공한가운데는 색이 없다(사라진다). 또는 “고故”라는 단어 자체의 뜻이 (옛날에, 본래, 원래)라는 뜻이 있다. “시是”는 옳다는 뜻이다. 그럼으로 시고(是故)를 한자에서 어찌 해석하는 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뜻만으로 본다면 “본래 옳다”로 볼 수 있겠다. “즉 원래 옳듯이, 공한 가운데 들면 색은 사라진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유가 색즉시공에서 색=공이라고 하였다. 색에 상태에 빠지면 그것자체가 “공”인데도 “색”인줄만 알 것이다. 반대로 “공”의 상태에 들면 색=공이기 때문에 “색”은 사라지고 “공”만이 있는 상태로 여겨질 것이다. 그럼으로 요약하면 “공한 가운데 들면 색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가 되겠다. 또는 앞서의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 공상(空相)이며 그것이 원래 옳으므로 공한 가운데 들면 각각으로는 생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며 깨끗하기도 하며 더러웁기도 하고 또한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는 그러한 “색”은 모두 사라진다고 보아도 되겠다. 돌아와서 이러하게 공한 가운데 색이 사라진 것이 바로 공삼매(텅빈삼매)에 들은 상태이다. 공한 가운데 현상이 사라진다. 즉 공한상태에 드니까 현상(색)이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지관(止觀) 중에서 처음에 “지”에 들면, 즉 생각이 모두 끊어지면, 공만 가이 없이 벌어진다. 나도 세상도 다 사라지고 공만 가이 없이 벌어진다. 이러한 “공”은 “공”의 모양이 아니다. 다 사라져서 마음이 텅 비었기에, 텅빈마음 즉 무심을 “공”이라고 이름 할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심(空心) 즉 무심이 되면 무색(현상은 모두 사라진다)이 된다. 이러한 “공중무색”이 모든 것을 밝힌 통론이다. 이러하게 삼매에 드니 바로 “반야”만 벌어지는 상태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후부터는 “공중무색”이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울까봐 각론을 펼치는 것이다.
또한 공무변처에서 세상이 모두 사라져서 인식이 끊어진 것뿐이 아니고, 나중에 비상비비상처를 지나서 해탈한 경지 즉 완성된 단계에서의 공중무색 까지 아우러서 중의(重意)적으로 이야기 된 것이다. 앞의 공무변처(공삼매, 텅빈삼매)에서의 공중무색은 말 그대로 세상이 사라진 것이다. 허나 뒤의 관(觀)은 마음은 온전히 멸하였고 그러므로 눈은 창이 되었고, 세상은 모두 다시 극락으로 청정하게 드러나서 “보는자도 보여지는 대상”도 없이 “봄”만이 있는 상태를 말한 것이기도 하다. 이 상태에서는 드디어 “공 과 색”이 하나 된 상태이다. 즉 공중무색 이거나 색중무공(色中無空, 색은 당연히 공이다. 색중무공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색에 빠져 있으면 공심을 모른다는 의미로 쓴 것이다)이 아니며 공색이 하나 된 상태를 말 하는 것이다. 허나 관자재보살이 말하는 공중무색에는 이미 중의적으로 “공색하나”를 말하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 하련다. 이하 모든 경지 역시 텅빈삼매(공삼매, 공무변처)와 외연삼매의 궁극 또는 해탈한 완전한 경지의 관자체 즉 관자재(觀自在)를 나타낸 것이다. 즉 금강경에 있어서의 “혜안”과 “불안”을 동시에 중의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허나 일단은 텅빈삼매(공삼매, 공무변처)에 맞추어서 이야기를 할 것이며, 또한 그러하게 이해하여 주기를 바란다. 무수상행식 마찬가지로 공중무“색”에서 “색”을 모든 현상으로 간주하여서 이야기가 끝이 난 것이다. 헌데 더 친절하게 어떻게 하여서 현상이 모두 사라졌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여기서 “색”을 두 가지로 보면 된다고 하였다. 현상전체와 나(몸과 마음)로 보면 된다. 즉 몸도 사라졌고, 느낌도, 인식도, 생각의 구성(의도, 경험)도, 생각도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즉 무수상행식을 한마디로 한다면 바로 무식(無識)이 된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져서 주관과 객관이 다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무식은 바로 “무심”이라는 이야기다. 마음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몸도, 느낌도, 인식작용도, 생각의구성도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무심은 바로 “무아”라는 이야기와도 같다. 즉 “무아”는 개아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공중무색에서 “색”을 현상만 모두 사라진 것으로 받아들일까 봐, 여기서는 몸에 관련한 “수상행식”도 모두 사라졌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사라져서 색수상행식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아의 색수상행식이 다 사라졌기 때문에 세상이 사라진 것이다. 즉 마음이 다 끊어져서 사라지고 그러하기 때문에 인식작용도 끊어졌고, 인식작용이 사라졌기 때문에 세상이 사라진 것이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게끔, 각론을 펼치는 것이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수상행식에서 이미 다 이야기 된 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까봐, 다시 한번 각론을 펼치는 것이다. 즉 인식작용이 모두 끊어져서, 작용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눈,귀,코,혀,몸의 인식작용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또한 느낌도 생각의구성도 생각도 몸도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생각이 끊어지면 어떠한 상태가 되는지 자세히 밝힌 것이다. 우리가 생각이 끊어진다는 것을 머리로 이해할까봐서 이러하게 자세히 설명되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러하게 색수상행식이 다 끊어져서 사라졌을 때만이 본래마음이 드러난다는 방법이기도 하다. 즉 색이 사라져야만 본래의 “공심”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색으로부터 마음을 거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무색성향미촉법 보여 지는 대상이 사라지고 들리어지는 대상이 사라지고 맛을 볼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지고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사라지고 현상전체와 생각을 내면에서 일으키게 하는 생각의 대상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즉 무안이비설신의에서 작용이 모두 끊어졌다는 것으로 이미 다 밝힌 것이지만은 더욱더 자세히 밝힌 각론이 된다. 즉 무안이면 눈의 보는 작용이 끊어졌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무색(無色) 즉 세상의 모든 보여 지는 것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비설신의 작용이 모두 끊어졌으며, 그러하므로 그것들의 대상인 성향미촉도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 된다. 또한 의식이 끊어졌으므로(혼절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의식의 대상인 “법”도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법(法)이란 (현상전체 +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내면의 대상들 전체)이다. 요약한다면 세상이 사라져서 안 보이는 것이 아니며, 생각이 사라지니까 인식작용이 사라지고 그러하기에 세상도 사라진다는 차례를 보인 것이다. 무안계 그러므로 눈에 경계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가 “꽃”을 볼 때에, 나 와 꽃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경계”가 있는 것이다. 이유는 “나”랑 “꽃”이랑 서로 다른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즉 무안으로서 눈이 보는 작용이 끊어졌고 그러므로 세상이 사라졌으니 당연히 “무안계”일터인데, 왜 이러한 이야기를 썼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하나는 무안이면 무색이라는 것의 뜻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그 상태가 무엇인지를 밝힌 것이 “무안계”이다. 다른 하나는 공중무색에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야기 되어진 “무심삼매”가 딱히 “공삼매(텅빈삼매)”라고만은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즉 “공삼매”와 “색삼매(색삼매중에서도 궁극인 관)” 둘 다를 중의적으로 포함하여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즉 “지”가 깊어지면 저절로 “관”이 된다. 그러므로 공중무색에서부터 무식 무안 무색으로 이어지는 상태는 물론 “지삼매”에 가깝다. 허나 그러한 것이 깊어지면 자연스레 “관삼매”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모두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무안계”는 “지삼매”에서는 무안으로서 눈이 보는 작용이 사라지고 그러므로 세상이 사라졌기 때문에 “무안계”인 것이며, 나아가서는 세상이 다 드러나서 비추어지더라도(보는 것이 아니다) 나랑 꽃과 다른 것이라고 여기는 그러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세상이 다시 드러나더라도, 전과 다른 것은 그것을 여기는 “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사라져서 “무아, 무심”인 상태에서 세상이 “있는 그대로” 본래마음에 비추어졌을 때, “보는 자와 보여 지는 대상”이 있지 아니하게 된다. 무아, 무심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세상만 있게 되며, 그 세상이 청정하게 비추어지더라도, 그 세상의 겉모습에 빠져서 생각이 움직이는 상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즉 꽃이 비추이더라도 꽃의 겉모습에 마음이 머물지 아니하며 꽃의 바탕 근본이 “공”이라는 것에 있게 된다. 즉 현상 모든 것의 겉모습이 어떠할지라도, 그 모두는 “공심”인 것이다. 이러할 때, “나”와 “꽃”이 두개의 분리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며, 그저 근본바탕이 “공심”인 현상만 있게 되는 것이다. 전체우주가 바로 “공심”이며, “나”가 사라진 상태에서 그 비추이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이 바로 “본래마음” 하나뿐인 것이다. 이러한 세상이 눈이라는 창에 거꾸로 비추어진다는 것 마저 넘어서면 드디어 “관”이 된다. 비추이는 것도 아니며, 오로지 “봄”이라는 것이다. 개아심이 다 소멸된 상태이다. 그러므로 “관삼매”에서 나와 너 가 있을 수가 없다. 경계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무안계”이며 그러므로 바로 “봄”이라고 이야기 되어진 것이다. “보는 자”와 “보여 지는 대상”이 있을 때는 두개의 분리 상태이다. 허나 생각이 온전히 끊어지면 “보는 자”와 “보여지는 대상”이라는 두개의 분리가 있을 수가 없다. 두개를 가르는 그러한 “경계”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안계”는 지와 관 둘 다를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무안계”가 내포하고 있는 뜻은 “눈을 뜨고” 삼매에 들었다는 것이다. 눈을 감고 드는 것보다 눈을 뜨고 무심삼매에 드는 것이 더 용이하다. 제상(諸相)이 상(相)이 아님을 알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는 것 역시 “눈을 뜨고” 상의 겉모습에 마음이 머물지 아니하고 근본바탕의 “공”이 되면 즉견여래라는 것이다. 번뇌가 많은 우리가 눈을 감으면, 더 많은 번뇌가 오락가락 한다. 허나 눈을 떠서 무엇엔가 몸도 꼼짝하지 아니하고, 눈동자도 꼼짝하지 아니하고 있다 보면 일심에 들기가 용이하여지며, 나아가서 무심에 들 수가 있게 된다. 내지 무의식계 “또는 무의식계”라는 이야기다. 또한 무안계라는 말에서 이야기 되어졌듯이 무이계, 무비계, 무설계, 무신계, 등등을 생략하였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는 드디어 “무의식계”라고 이야기 된 것이다. 이곳에 쓰여 진 “무의식”은 앞서 참회에서 “의식, 무의식”할 때 쓰던 그 “무의식”이 아니다. 앞서의 “무의식”이라고 쓴 것은 불교의 “아뢰야식”을 현대적인 용어로 바꾸어서 쓴 것일 뿐이다. 허나 지금 나오고 있는 “무의식계”는 그러한 아뢰야식이 아니며, 말 그대로 “생각이 온전히 끊어졌다. 또는 마음이 모두 사라졌다”가 바로 “무의식”이다. 말 그대로 의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하다고 기절이나 혼절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허나 “무심”으로서 온전히 생각이 끊어지면 혼절이 아니며, 그제서야 반야가 드러난다. 그러하게 마음이 사라졌을 때 드디어 “경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무의식계”라는 것은 “마음이 사라지므로, 마음이 지어놓았던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에는 형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그 형체가 바로 “경계”가 된다. 즉 나와 다른 것들 사이를 분별하고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형체이며 “경계”이다. 마음에는 형체가 있을까 없을까? 우리는 흔히 마음에는 형체가 없다고 한다. 허나 “개아마음”에는 형체가 있으며 “경계”가 있다. 우리는 “나의마음” "너의 마음“은 서로 다른 마음이라고 여긴다. 서로 다른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의 형체가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너와 나 사이의 어디쯤엔가는 눈에 보이지 아니 하는 “경계”가 분명히 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개아 마음이 본래전체인 반야가 못되게 막고 있는 것이다. 본래마음밖에 없다고들 한다. 우주안과 넘어서의 무한대의 전체는 오로지 “하나”의 본래마음뿐이라고 한다. 그러하다면 본래 하나인 것을 하나 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스스로 요만한 마음이 나라고 우기고, “너의 마음” 등등으로 나누어 놓은 그것이 범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개아마음”이 사라지면 즉 무의식이 되면 전체가 되므로 “경계”가 존재 하지 아니한다. 즉 모두가 하나의 붓다마음이지, 가지가지의 중생마음이란 없게 되는 것이다. 즉 관(觀)에서 세상이 다 드러나도, 그 세상과 나눌 수가 있는 “나”라는 것이 사라진다. 다 본래마음뿐인 것이다. 무의식계 즉 무심이므로 세상은 모두 하나의 본래마음뿐이게 된다. 그러하므로 “봄”에서는 자타를 구분할 “경계”가 없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온전한 공삼매 색삼매 또는 지관삼매가 다 이루어져서, 온전히 “반야”가 드러난 상태이다. 즉 “반야”가 바로 “봄”이다. 그러므로 “관자재”에서 보듯이 오로지 “봄”만이 유일한 실재인 것이다. 앞에서 주로 “눈”으로 이 상태를 표현해 보려고 하였으므로 혹자는 오해 할 수도 있을 듯하다. “눈”의 문제가 아니며 마음의 문제이다. 마음의 경계가 사라지면 전체의마음이 된다. 이러할 때 올올이 각성이 된다. 각성자체만 있게 된다. 이러할 때 오롯이 반야 하나뿐이기 때문에 즉 무경계이기 때문에 “봄”만이 있다. 무무명 여기서부터는 “혜”가 드러나니 어떻게 되었는가? 즉 결론이 어찌 되었는가 하는 부분이 이야기된다. 무명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무명이란 다른 말로 무지이다. 즉 붓다가 사성제에서 말씀하시길 모든 고통의 원인이 이 “무명”이라고 하셨다. 사실 “무명”은 개아(몸과 마음)가 “나”라고 여기는 것이다. “혜”가 드러나서 “전체”가 되었기에 “개아가 나다”라는 생각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이 사라진 것이다. 이러므로 붓다가 가장 상승법으로 “무아”를 말씀하신 것이다. “개아”가 “본래나”일리는 없다는 것이다. 본래가 붓다라는 이야기다. 또한 무명이 사라지려면 개아가 아닌 전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또한 전체가 되려면 무심삼매에 들지 아니하고서는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무심삼매에서만이 “본래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무명(無明)이 다하였다는 것은, 갈애(渴愛)가 모두 소멸하였다는 것이다. 이 말은 탐진치가 모두 소멸하였다는 것이다. 역무무명진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고. 또한 무명이 영원히 그치는 것도 없고. 앞에서는 무명이 사라졌다고 이야기 되어졌다. 우리 모두는 그 말을 반갑게 들었을 터이고 이치에 맞으므로 끄덕였을 듯싶다. 헌데 갑자기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고”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당황스러울 듯 하다. 열역학 제1법칙을 떠올려보자. 색이공이요 공이색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불생불멸이 생멸이라고도 이야기 하였다. 무시무종이다. 그러므로 반야가 드러나서 무명은 사라졌다. 허나 이 현상은 영원히 다함이 없다. 또한 여기에는 조금 다른 뜻도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들 살펴보길 바라며 남겨 놓는다. 내지 무노사 내지는 노사도 없고. 즉 반야가 드러났으므로, 불생불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늙음도 죽음도 없는 것이다. 무엇이 그러한가? “본래마음”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또한 붓다는 사성제의 “고통이 있다”는 대목에서 제일 첫 번째 고통으로 “생노병사”를 말씀 하셨다. 헌데 사성제 3번째인 “고통을 멸하였다”에서는 “갈애의 소멸이 해탈”이라고 말씀 하셨다. 생노병사가 주된 고통인데 그것을 멸하는 방법으로는 갈애의 소멸을 이야기 한 것이다. 이 말은 “갈애로부터의 해탈”이 바로 “생사해탈”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이유는 12연기를 보면 나와 있다. 즉 무명(無明)에 의하여 갈애(渴愛)가 있게 되며, 갈애에 의하여 생(生)이 있게 되며, 이어서 노병사(老病死)가 있게 된다. 자세한 12연기는 생략 하였다. 요약한다면 탐진치의 소멸이 해탈이라고 붓다에 의해 설해졌다. 이것은 “무아”와 같은 이야기다. 이유가 개아가 있는 한 탐진치를 완전히 소멸하기는 불가(不可)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탐진치를 완전히 소멸하면은 “무아”가 된다. 개아가 “무아”가 되면 “전체”가 되는 것이다. 다시 요약한다면 붓다는 최우선적으로는 “무아”를 법으로 내세우시고, 다음으로는 탐진치를 소멸하라고 하였다. 물론 완전히 소멸하면 무아이니 같은 이야기다. 그러시고는 탐진치의 완전한 소멸이 개아로서는 힘이 들다고 보시고는 바른생각-일심-무심 등의 방법론을 (고통을 멸하는 길)로서 제시 하신 것이다. 무심이 본래마음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한 무심삼매에서 스스로 개아가 아님을 알고, 개아(탐진치)를 더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요약 한다. 개아이기 때문에 “생노병사”한다. 헌데 개아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본디 불생불멸이다. 헌데 개아들은 스스로 개아라는 착각을 못 벗어난다. 그 이유는 “탐진치”때문이다. 즉 “갈애”때문이다. 현상에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느끼고, 사유하는 “즐거움”에 빠져있는 한, “색”의 세계가 전부라고 느낀다. 그러는 즉시 중생자작생사고(衆生自作生死苦, 중생이 스스로 생사의 고통을 만들었다) 하게 된다. 그러므로 붓다는 “갈애로부터의 해탈”을 말씀 하신 것이다. 그러고는 방법론으로 바른생각-일심-무심을 말씀 하신 것이다. 즉 갈애(탐진치)로부터 해탈을 하면은 동시에 “무아”가 되며 동시에 “전체”가 되었기 때문에 동시에 “생사해탈”이 자연스레 이루어 진 것이다. 그럼으로 “갈애의 해탈”이 “생사해탈”이며 열반인 것이다. 헌데 그것이 본래 그런 것이었다는 것이다. 본래 우리는 그러한 것인데, 지금 스스로들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돌아와서 이야기 한다. 앞에서 보면 “무무명”이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무노사”가 나온다. 즉 “무명이 사라지니” 동시에 “생사해탈”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무명은 어찌 사라졌는가? 무명은 탐진치 없애고 무심삼매에 들으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는 삿된생각-바른생각-일심-무심-무아(본래마음) 이라고 하신 것이며 “삿된생각”으로부터 본래마음까지 탐진치를 버리고 또 버리라는 것이다. 또는 그것을 다른 말씀으로는 생각을 버리고 또 버리라고도 하신 것이다. 또는 “무아”가 되라고 하신 것이다. 역무노사진 또한 늙음과 죽음이 다함도 없고. 본래마음이 되어서 온전한 깨어있음이 되었으니, 형체 없는 반야인 본래마음이야 당연히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불생불멸이다. 허나 그러하다고 육체의 늙음과 죽음도 피할 수가 있을까? 없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불생불멸이 변한다는 법칙처럼, 색이었을 때는 몸과 마음이 “나”인줄 알아서 필경 “죽음”이구나 여겼지만은, 이제 온전히 깨어있는 불생불멸의 반야이기 때문에 늙음과 죽음은 다 사라졌다. 허나 여전히 몸과 마음은 필경 변한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늙음과 죽음이다. 허나 몸과 마음이 늙고 죽는다고 하여서, 진정으로 죽는 것이 아니다. 무아이어서 그것은 “본래나”의 쓰임에 불과 하였는데, 쓰임의 도구들은 모두 변하여 소멸하는 겉모습을 띠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반야(본래마음)는 무노사이며 몸과 마음은 역무노사진이다. 이것은 현상 모두에 통하는 것이다. 모든 모습 있는 것들은 즉 겉모습은 늘 변한다. 그것들은 생노병사의 모습을 띠운다. 그러므로 붓다가 아무리 고귀한 개아라도 되지 말고, 형체 없으나 없는 것이 아닌, 바로 그 “깨어있는 반야”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무고집멸도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의 원인도 사라지고 고통을 멸했다는 것도 사라지고 고통을 멸할 길이라는 팔정도와 팔선정도 사라졌다. 붓다가 고통을 무엇으로 규정하셨는가? 생노병사가 고통이요. 변하는 것이 모두 고통이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고통이요. 미워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고통이요. 구하고자 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는 게 고통이라고 하셨다. 자 불생불멸이 되었으니 생노병사라는 고통이 사라졌다. 불변이 되었으니 변하는 것이 고통인 것이 사라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여 보아야 어찌 이별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전체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사라졌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가장 가슴 아픈 이별은 죽음이다. 허나 그것이 사라졌기에 고통은 사라졌다. 자타가 없이 반야뿐인데 미워하는 사람이 어찌 있을 수가 있겠는가? 무엇을 구한 다는 말인가? 개아는 무엇을 구해서 행복하려고 하지만은 결국에는 구한 몇 가지에 걸려서 오히려 구속이 된다. 반야가 온전히 현상으로 펼쳐져 있어서 다 갖추었는데, 무엇을 더 구한다는 말인가? 더 구할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반야외에 무엇이 또 있다는 것이 되며, 이미 그러하다면 그것은 이름만 “반야”일뿐 “반야”가 아닌 것이다. 고통의 원인인 갈애가 사라졌고, 그러므로 무명이 사라져서, 온전한 “반야”가 드러났다. 그러므로 고통의 원인도 사라진 것이다. 고통이 있을 때만이 고통의 원인이 있게 되는 것이다. 고통이 사라졌을 때는 고통의 원인이란 존재하지 아니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을 멸하였다는 것이 바로 위에서 말하였듯이 된 것이다.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고통을 멸함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고통이 있지 아니하므로 고통을 멸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아니하게 된다. 또는 갈애가 사라졌으므로 고통을 멸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아니하게 된다. 고통을 멸할 길로 팔정도 팔삼매가 설하여졌다. 고통이 있지 아니하므로 고통을 멸하는 길은 존재하지 아니하게 된다. 이 말은 삼매상태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삼매 하는 바 없이 늘 본연삼매(本然三昧) 상태라는 이야기 된다. 본연이란 본래 그러하다는 뜻이다. “본래 그러하다”는 것은 “본래 스스로 있는”이다. 원인과 결과 없이 “본래 스스로 있는”이다. “관자재”의 “자재(自在)”와 같은 것이다. 또한 늘 관(觀, 봄)이 아닐 때에, 그러하게 늘 “관”이고자 하는 마지막 의도가 사실은 유위(有爲)임을 알게 된다. 그 의도와 작위를 모두 버렸을 때 “관자재”이다. 이것은 바로 “무아”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허나 위의 말을 오해 하여서 무심삼매도 하지 아니 하여야 한다고 여기는 것은 금물이다.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 하였듯이 탐진치 빼어내거나 무아로 갔을때에 저절로 마음은 평화로워지며 나아가 수행을 안 하였다고 하여도 저절로 무심삼매가 된다. 그러므로 누군가 무심삼매가 아니 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머리로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텅빈삼매와 외연삼매가 깊어져서 꼭지점에서 만났을 때 즉 “하고자” 한다면 늘 무심할 수가 있다고 여겨질 때, 허나 그 “하고자”하는 것이 여전히 유위(有爲, 함이 있다. 의도와 작위)임을 알고, 함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은 모두 다시 사라질 것을 알고, 그제서야 늘 전체이고자 하는 개아의 마지막 의도와 작위를 모두 버리는 길로 가게 된다. 고집멸도는 우리가 무명에 의하여 개아라고 믿고 있을 때에 “번뇌”가 있는 것이므로, 그 “번뇌”를 없애기 위하여 제시된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제 병을 고쳤으니 “약”은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무지역무득 반야도 없고 또한 얻은 바도 없다. 본디 “반야”였다. 한번이라도 “반야”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색자체가 늘 “공”이었는데 우리는 “색”에만 빠져있어서 몰랐을 뿐이다. 그러므로 “색”의 입장에서 본다면, 별도의 “공”이라는 또는 “반야”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고는 그것을 추구 하였던 것이다. “반야”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로지 “반야”뿐이다. 다만 몰랐을 때는 “반야” “반야” 하였지만은, 이제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 되고 보니 늘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늘 그것이었던 것을 알고 되고 보니, 늘 “올올한 각성, 깨어있음, 봄”이었다. 허나 늘 그러한 것을 알고 되지 못한 것이 그것을 가리우고 있던 “번뇌” 때문이었다. 그러한 번뇌의 원인인 뿌리는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의 원인은 개아(무지)였다. 본디 그것이었기 때문에 새삼스레 “반야”라고 할 것도 없다. 또한 이러한 “반야” “올올한 각성, 봄”이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혜”도 아니다. 오로지 하나의 “관, 봄”뿐이다. 그곳에는 “반야”라는 이름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또한 “얻은바가 없다”가 된다. 얻은 것이 아니며, 본래의 상태였던 것이다. 무지스러워서 “개아가 나”라고 여겼기 때문에 오히려 반야가드러나지 아니하였던 것 뿐이다. 즉 늘 반야였는데, 스스로 모르고 있다가, 본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 온 것뿐이다. 그러므로 얻은 것이 없다. 또한 만약 반야라는 것이 개아가 노력하여서 “얻어진 무엇”이라면 그것은 “반야”가 아니다. “얻은자와 얻어진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두개의 분리”상태이다. 그러할 때 “얻어진 무엇”은 전체가 아니며, 그저 부분일 뿐이다. 그러하다면 그것은 불생불멸도 아니며 그저 생멸하는 현상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얻은바가 없이 본래마음이 된 것을, 굳이 얻었다고 설명하기 위하여 말할 뿐인 것이다. 허나 또한 위의 말을 잘못 이해하여서 본디 반야였으니 지금 번뇌를 안고도 반야라고 여기는 것은 금물이다. 본디의 반야는 온전한 평화이며, 온전한 각성상태이며, 온전한 관상태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 바로 “생각, 마음”이다. 그것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 바로 “번뇌”이다. 그것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 바로 “개아”이다. 그러므로 개아=번뇌=생각 이다. 그러므로 전체=온전한 평화=반야 이다. www.soonil.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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