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천부경에 시작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되어서 마지막 구절은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로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둘 다의 뜻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시작도 끝도 없다”에서 보듯이, 시작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즉 불생불멸이란 단어 뜻에서 보듯이 “불생”이므로, 생겨난 적이 없다는 뜻과 같을 것이다.......“공”이라는 근본의 “하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공과색이 별개의 것이 아니므로 “공”하나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시작도 없이 공과색이 한 묶음으로 있어 왔다는 이야기다.→ 천부경의 한 구절을 통해서 위와 같이 반야심경을 해석하는 것은, 도덕경의 경우에 말했듯이, 타종교 내지는 종파의 가르침을 불교경전 해석에 적용할 때 문제가 있다. 위와 같이 해석한 분은, “일시무시일”과 “일종무종일”이란 말에서 “무시무종”, 즉 시작도 끝도 없다는 의미를 찾아냈는데, 타종교에서 “시작도 끝도 없다”는 말을 쓸 때와 대승불교에서 “시작도 끝도 없다”라는 말을 쓸 때, 비록 같은 말을 사용한다 해도,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상당히 다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시무종, 즉 공성의 관점에서 본 무시무종이란 말은, 어떤 존재론적 관점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즉, “A라는 사물이 생겨난 적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누군가가 “A는 생겨났다” 혹은 “A는 없어졌다”라고 말할 때 적용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혹은 “생겨난 적도 없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라는 말은 존재론적인 의미의 말이 아니라, 다만 그와 반대되는 주장을 부정하기 위해 설정된 개념일 뿐이다. 개념분별, 그것이 아무리 역설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개념분별을 실체론적으로 이해해서, 그러한 표현이 가리키는 어떤 무엇이 실제로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첫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공”이라는 것은 어떤 무엇이 비롯되는 “근본”이 아니다. 만약, 공이 그런 것이라면, 불설의 핵심이 무아론에 근본적을 위배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물이 있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작도 없이 공과색이 한묶음으로 있어 왔다”라는 말은, 근본적으로 부처의 공사상에 위배된다. 즉, 공이나 색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론적 사고나 실체론적인 사고의 맥락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공”은 현상세계의 근원이 아니고, 현상세계가 비롯되는 근거도 아니다. “공”은 단순히 어떤 무엇에 대한 진술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낫다. 즉, 그러한 분별들이 가리키는 어떤 무엇인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과색이 한 묶음”이라는 말의 단순히 개념분별의 한 단면일 뿐, 그런 말이 가리키는 어떤 진리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2) 일종무종일을 살펴보면 마찬가지로 “하나로(근본으로)돌아감으로써, 모든 것을 마친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그러하게 근본으로 끝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근본”만이 있는 그러한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만약에 “색”과 “공”이 별개의 것이라면 색은 영원히 “공”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전체라는 것은 반쪽짜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로 끝난다고 말은 하지만, 색이 사라진 “공”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허나 모든 색들은 일(一)로 일단 돌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애초의 근본이 바로 “하나”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그러해서 근본으로 돌아가 보니, “아하 2,3,4 모두가 근본 이었구나”로 귀결되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로 돌아가기 위하여 “근본은 하나이다.”라고 밝힌 것이며, 허나 그러한 근본이 근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늘 현상으로 보여 지기 때문에 무시일(無始一)이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하나로 시작한 것이 아니며 현상자체가 근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몰랐을 뿐.......이 현상자체가 모두 전체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 얼핏 위의 주장을 읽어보면 의미심장하고 그럴 듯한 심오한 해석이 될 수 있고, 심지어 동양적 사유방법의 한 전형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러나, 대승적 공관에 비추어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 위와 같은 주장들은 전적으로 “형이상학적 해석”내지는 “특정한 종파의 교리 내지는 철학적 이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런 주장들은 하나같이 불분명한 전제들과 가정, 혹은 언어습관에 근거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근본”이라는 말을 들어서 분석해보면, “근본”이란 말은 반드시 “근본이 아닌 것”을 전제로 해서만 성립한다. 다시 말해, “근본”이란 말과 “근본이 아닌 것”을 관계짓는데, 실제로 객관세계에서 “근본”에 해당하는 것과 “근본이 아닌 것”에 해당하는 사물을 찾을 수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본질적으로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우리 각자의 주관적 개념투사에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근본”이란 말과 “근본이 아닌 것”이란 말은 다만 추상적 개념분별의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 구체적인 실제 세계에서 그런 말들이 가리키는 것을 찾을 수 없다. 거기에 “자성의 없음”을 의미하는 무아, 내지는 공성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힌트가 있다. “하나로 시작한 것이 아니며 현상자체가 근본이었다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근본”으로서의 “하나”와 “현상”을 동일한 것으로 보면서 현상자체가 근본이라고 주장하는데, 지나친 개념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는 무리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자체가 근본이라면, 애당초 부처도 없을 것이고, 부처가 없으면 팔만사천법문이 없을 것이고, 결국 불교의 모든 것이 와해될 것이다. 그러면, 부처의 열반은 어디서 찾으며, 지금 이 순간도 수행에 매진하고 있는 모든 수행자들의 목표가 없게 된다. 수행의 목표에 도달한 다음에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혹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 역시 지나친 언어관습이다. 현상세계가 근본일 수 없음은, 사성제중의 멸제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공즉시색에 대한 빗나간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몰랐을 뿐.......이 현상자체가 모두 전체의 표현이었던 것이다”는 말은 수많은 선사들과 수행자들이 되뇌이는 말이지만, 정작 우리가 몰랐던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 많은 분별적 개념들이 가리키는 그 어떤 것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현상자체가 모두 전체의 표현”이라는 말은 “범신론”적인 이해의 한 단면인데, 그 역시 부처가 부정했던 것일 뿐이다. (3) 화두에 만법(萬法)은 어디로 귀일(歸一)하며, 그 하나는 어데로 돌아가는가? 하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즉 만법은 현상전체인데, 이 모든 세상은 어느 하나로 돌아가는가? 또는 이 하나가 무엇인가? 또한 이 하나는 다시 어데로 돌아가는가? 하는 물음이다. 이 현상은 “공” 하나로 돌아갈 것이며, 이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고, 이 “공”은 다시 만법(色, 현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바로 모든 색은 공으로 돌아가고 또한 공은 다시 색으로 돌아온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색즉시공은 말 그대로 색=공이라는 이야기다. → 만법은 어디로 귀일하는가? 중요한 화두다. 그렇지만, 현상이 “공” 하나로 돌아갈 것이며, 이 “공”은 다시 만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함은 역시 실체론적인 해석으로, 경계해야 할 해석이다. 만물을 있게 한 근원으로서의 원인인 “공”과 그것의 결과인 “만법”을 설정함은 역시 무아론을 주창하신 부처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난다. “만법은 어디로 귀일하는가?”는 말은 그런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지극히 부처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색”이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세계와 “공”라고 부를 수 있는 “근본”이 있어서, 그 둘이 하나이면서도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 식으로 실체론적으로 해석하면, 숱한 모순에 빠진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색즉시공을 “연기가 곧 공성”이라고 해석하시고, 공즉시색을 “공성이 곧 연기”라고 해석하신다. 음미해볼 말씀이다. 달라이 라마의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기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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