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헌데 붓다는 고(苦)와 락(樂)의 중도를 이야기 하였다.....듣기로 붓다가 네 가지의 중도를 말씀하셨다고 한다.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억하기로, 선과악(善惡)의 중도(中道) 고와락(苦樂)의 중도 무와유(無有)의 중도 단과상(斷常)의 중도 ......... 본래마음은 형체가 없다, 그러므로 “無”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다. 현상은 형체가 있다. 그러므로 “有”라고 이야기 할 수가 있다. 허나 유즉시무(有卽是無) 무즉시유(無卽是有) 라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에서 밝혔으니 “무와 유는 다른 것이다.”라는 분별은 진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상(諸相)이 상(相)이 아님을 알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고 금강경에서 설해졌다. → 부처의 가르침은 다른 말로 “중도의 가르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부처의 가르침의 독특한 면은 바로 그 “중도의 가르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 보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중도의 가르침을 펼친 이가 부처이기 때문이다. “중도”가 제일 먼저 거론되는 것은, 부처께서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쾌락적 삶과 고행적 삶의 양극단을 취하시다가, 그 두 극단에서 벗어난 “중도”의 길을 취하시면서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 오면, 중도의 가르침은 공성의 가르침으로 불리고, 그것은 중관의 도라고 불린다. “선과악(善惡)의 중도(中道), 고와락(苦樂)의 중도, 무와유(無有)의 중도, 단과상(斷常)의 중도”에서 말하는 중도의 의미는, 단순히 양적 균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불교를 공부한 사람이면 쉽게 알 수 있다. “선과 악의 중도”에 대해 이해하면, 나머지 다른 중도에 대해서도 유추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고유한 실체가 있어서,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특히 “악”이라는 다른 대립되는 것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듯이, “선”은 “악”이라는 것에 상호의존하고 있고, 나아가서 선과 악 모두 인간의 개념분별의 산물일 뿐, 고유의 자성적 실체가 없다는 의미에서 중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애당초 “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언뜻 보면, 선과 악을 모두 부정해서, 단견, 즉 일체를 부정만 하는 단견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중도의 의미를 그렇게 생각하면, 이미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일찍이, 중관의 대논사인 월칭 보살은 “공성”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설하면, 그 악업이 크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이에게 공성에 대해 가르치면, 그 사람의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고, 결국에는 올바른 깨달음의 법에서 멀어지게 하기 쉽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와 락, 무와 유, 단과 상 역시 실체성을 전제로 설정된 분별일 뿐인데, 사실상 그런 분별들이 가리키는 실체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중도”를 이해해야 한다. 무엇이 “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없다”를 전제로 해야 하는데, 동시에 “없다”는 “있다”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된다. 그렇게 되면 모순에 빠지게 된다. 말 그대로,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혼란에 빠진다. 우리는 그런 분별을 당연한 듯이 쓰고 있는 것이다. “있다”와 “없다”는 단순히 개념일 뿐, 그런 개념들이 가리키는 실체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에 “무와유의 중도”의 의미가 있다. “있다”와 “없다”를 실체론적으로, 즉 현상계는 “유”의 세계이고, 그 현상계를 있게 한 원인으로서 “무”를 설정하면, 이미 실체론에 빠져서 부처의 무아론에 역시 어긋나는 것이다. 진정으로 있는 것이 무엇이며, “있다”라고 할 때의 그 “있다”가 진정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탐착해 들어갈 때, “있다”라는 개념분별이 가리키는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거기에서 “무와 유의 중도”에 대한 이해가 이루어진다. “무”와 “유”가 실체론적인 의미에서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면 더욱 심각한 오류에 빠진다. 실체론적인 “무”는 “유”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제상(諸相)이 상(相)이 아님을 알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는 말을 이해할 때도, 그와 같이 이해해야 한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제법의 상, 즉 실체나 속성들이 개념분별에 의지하는 것일 뿐, 그런 상이 실제로 가리키는 것이 객관적으로 고유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실상에 대한 인식이다. 다시 말해, 제법에 대해 경험하는 모든 속성들은 그런 속성으로서의 실체성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인식을 말함이다. 우리가 당연시하면서 경험하는 일체 현상의 상(속성)이 실제로 그런 상(속성)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그것이 곧 여래, 즉 불성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문제시삼고, 믿고 당연시하는 것들 모두가 개념분별의 산물일 뿐, 다시 말해, 개념분별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일 뿐, 고유한 실체, 즉 자성이 전혀 없음을 이해한다면, 인간사 모든 문제에서 자유로울 것이고, 무엇이 실상인지 알게 될 것이다. (2) 이제 반야심경으로 돌아가 보겠다. 제목이 마하반야바라밀다경 이다. 마하란 대소(大小)의 “큰”이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마하란 물론 크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전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허나 작은 것과의 비교의미인 “전체”가 아니다. 앞에서 이미 무한대(無限大)=무한소(無限小) 라고 이야기 하였다. 무한소로 가서 원자 전자 더 작게 가면은 형체는 완전히 사라진다. 그것이 무한소이다. 무한대로 나아가면은 우주 전체로, 또한 우주 밖으로 무한으로 나가다 보면 형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무한대이다. 즉 무한소와 무한대라는 말로 대소를 표현하긴 하였지만은 사실은 면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형체가 없기 때문에 “작다 크다”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만 “공”이라고 이야기 되어진다. → “크다”와 “작다”라는 말을 실체론적으로 이해하면 심각한 오류에 빠진다. 셀 수 없이 무수하게 쪼개다보면 결국 형체가 없어진다는 식으로 “작다” 혹은 “무한소”에 대해 이해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셀 수 없이 무수하게 쪼갠다는 것은 우리의 상념 속에서나 가능할 뿐, 실제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가 “무수히” 쪼개는 것인지, 그 한계점을 정할 수도 없거니와, 어디까지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순간인지도 정할 수도 없고, 쪼개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순간이 어느 순간인지도 정할 수도 없기 때문에, 막연한 개념적 상념에서 나온 결론일 뿐이다. 우리의 사유작용은 쉽게 추상화하고 일반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가운데, 거의 본능적으로 진행된다. 부처의 말씀대로, 우리의 개념분별의 다른 이름인 “무지”는 무시이래로 계속되어온 습성인 것이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순간, 혹은 완전히 쪼개어서 형체가 사라지는 식의 결론은, 그저 추상적 상념 속에서나 가능할 뿐, 실제로 그런 개념이 가리키는 것이 실재할 수 없다. 우리의 상념 작용은 습관적으로 전혀 관계가 없는 것들 사이에 관계를 맺는데, “무수히 쪼개다가 형체가 사라진다”는 식의 설정이 그것이다. 쪼개는 것은 형체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형체가 사라지면 더 이상 쪼갤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말 그대로 있던 것이 없는 것으로, 유가 무로 되어버리는 것이고, 그것은 단순히 개념적 대립관념일 뿐인 “유”와 “무”를 실체론적으로 이해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쪼갠다”는 것은 쪼개는 과정에서 있던 것을 없던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일정한 공간적 부피를 점유하고 있는 물체의 부피를 나누는 것일 뿐, 일정한 부피가 있는 한 무한하게 부피를 양분할 수 있기 때문에, 일정한 부피를 점하고 있는 형체가 사라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크다”라는 말이나 “무한하다”라는 말 역시 그런 오류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한소의 세계는 원자로 대표되는 미립자의 세계를 빗대어서 이해하는데, 오해하고 있는 것은, 물질을 쪼개면서 도달하는 세계는 미립자의 세계가 아니라, 보다 더 정밀한 관측기계와 보다 더 정밀한 개념들을 통해서 접근하는 세계가 미립자의 세계다. 다시 말해, 보다 더 정밀한 관측기계가 발명되고 보다 더 정밀하고 미세한 개념들이 사용되면서 그 만큼 더 미세한 세계가 발견되는 것이다. 칼로 사과를 자르듯이 쪼갠다는 것은 너무 소박한 발상이다. 대우주적 무한대의 세계 역시 그런 것이다. 공간적인 의미에서 보다 더 확장된 관측기계와 보다 더 확장된 공간개념을 사용하면서 발견되는 세계가 무한대의 의미라고 이해해야 한다. 과연 개념이 먼저 설정되지 않고서 실제적인 과학상의 발견이나 이론이 정립될 수가 있을지 깊이 고찰해 볼 일이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청 진동수대가 있기 때문에, 너무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없고, 너무 큰 소리도 들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생명체들은 인간이 들을 수 없는 너무 작은 소리나 너무 큰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경험할 수 없고,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런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인간중심적 세계관이다. 부처의 깨달음을 그런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비추어서 이해하면, 부처의 가르침을 너무 낮게 평가하는 것이다. “무한소”나 “무한대”라는 말은 그저 추상적 상념에서나 가능한 개념일 뿐, 실제로 현실에 적용될 수 없는 개념들이다. 오히려, 무한소나 무한대라는 개념은 단순히 상대적인 의미에서 무한소이고 무한대라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론은, 위와 같은 의미의 상대적 우주론을 그 당시에 이해할 수 있었던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형체가 없기 때문에 “작다 크다”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다만 “공”이라고 이야기 되어진다.”라는 식의 이해는 너무 소박한 감성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공”을 실체화하는 오류에 빠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