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동 연구실에서 <開善寺 智藏과 三論學의 성립>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마감일 전까지 마무리 하기 위해 자료들과 씨름하다가 탈진하여 집으로 돌아온 후 잠깐 산책 나갔다 오니 질문이 다시 올라와 있네요. 많이 힘들긴 하지만, 어쨌든 다시 답해보겠습니다. <달라이라마의 하바드 강의>라는 책을 읽어 본 적은 없지만 올려주신 내용을 읽어 보니
유식학의 번뇌장과 소지장에 대해 강의하신 것이네요. 유식학에서 "보살이 7지 이하에서 번뇌장을 제거해야 그 이후에 소지장을 제거할 수 있다."는 설명이나 "아공을 먼저 추구한 다음에 나중에 법공을 추구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저의 말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제가 "중론의 논리를 체득함으로서 소지장을 제거할 수는 있지만 수행을 통해 번뇌장을 제거해야 한다"고 썼다고 하셨는데 저의 글 가운데 어디에서 그런 문장을 보셨는지요? 본 문답에서 제가 쓴 글을 다시 보니 "따라서 '자아 개념'의 허구성을 머리로 이해하기 이전에, '이기심의 뿌리이고 분노심의 원천인 감성적 자아'에 대한 집착을 먼저 많이 해소해야 합니다." 라든지 "법공을 자각함으로써 아공을 자각하고자 할 경우, 자칫하면 我有法空의 상태에 머물게 되기에 앞에서 썻듯이 가치판단을 상실하여 막행막식하는 폐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반대로, 아공을 자각함으로써 법공을 자각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안전합니다." 라든지 "아집이 강한 분의 경우 아공에 대한 추구가 어느 정도 무르익은 다음에 법공을 추구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습니다." 라든지 "월칭의 '수레 태우기'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공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원래 목표입니다. 수레를 태우기 위해 불을 붙인 후, 혹 나중에 다 타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다시 불을 붙여 완전히 태우듯이 아공의 체득을 목표로 삼아 수행하다가, 어느 정도 수행이 무르익으면 법공의 체득을 위한 수행에 들어가야 합니다. 수레 전체에 대한 조망 없이 눈 앞에 보이는 바퀴를 태우고, 손잡이를 태우고, 굴대를 태우고 .... 와 같은 방식을 사용할 경우 수레가 완전히 타기 전의 어느 단계에서 멈추기 쉽습니다." 라든지 "아공을 추구한 다음에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법공을 추구하는 것이 수행의 올바른 순서입니다. 불교사상사적으로 보아도, 아공에 대한 조망(초기불교) 이후에 그에 대한 오해(일부 소승아비달마 불교도)가 일어나자 더 미세하게 법공에 대한 조망(대승반야중관)이 제시됩니다." 라고 쓴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루드라님이 인용하셨듯이 "중론의 논리를 체득함으로서 소지장을 제거할 수는 있지만 수행을 통해 번뇌장을 제거해야 한다"고 쓴 적은 없습니다. 오해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아공'의 수행을 먼저 한 후 '법공'의 자각을 통해 공성의 조망을 완성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여기서 쓴 '아공의 수행'이 달라이라마 스님 강의하신 '번뇌장의 제거'이고 법공의 자각이 '소지장의 제거'입니다. 따라서 '제 설명'과 '달라이라마 스님의 강의', 또는 '궁탕꾄촉땐배된메 스님'의 설명에 차이점은 없습니다. 한 가지 첨언한다면 유식학에서 가르치는 '보살의 10地'는,
초기불전이나 소승아비달마의 '見道와 修道의 수행 단계'에 그대로 대응되며, '대승신화(Mahāyāna myth)'에 맞추어 그 기간만 3아승기 100겁으로 늘여 놓은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서 유식학 문헌을 연구할 경우 그 내용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질문에서 달라이라마 스님의 강의 내용과 제 설명이 다르다고 쓰셨는데,
위에서 제가 해명했듯이 전혀 다르지 않으니, 문답을 이 정도에서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 ┃교수님의 수행론에는 백퍼센트 공감합니다. 이제 불교에 입문한 저로서는 현실적으로 받아드려집니다. 하지만 정확한 내용을 알아야 하겠기에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달라이라마 하바드 강의> 라는 책의 P.168 그리고 P.169에 나오는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 ┃귀류논증파는 본질적인 존재가 있다는 생각자체를 주된 번뇌장이라고 단정하고 그런 오해에 의해 생긴 업의 종자를 소지장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우선 번뇌장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서는 소지장에 대한 실제적 치료제의 사용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궁탕꾄촉땐배된메는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예를들어 설명했습니다. 마늘을 그릇에 담아 놓으면 그 그릇에는 마늘냄새가 뱁니다. 만일 그 그릇을 냄새가 안나게 깨끗이 씻으려면 우선 마늘냄새부터 치워야합니다. 본래적인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은 마늘이 냄새를 남기듯이, 본래적인 존재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마음속에 업종자를 남깁니다. 따라서 본래적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식을 마음에서없애때 까지는 전에는 마음이라는 그릇에 남긴 마늘 냄새처럼 그런 업의 종자를 없앨수가 없습니다. 첫째로 마늘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늘 냄새도 없앨수 있습니다. ┃ ┃귀류논증 중관학파는 수행자가 모든 번뇌장을 완전히 없애기 전에는 소지장을 없애기를 시작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보살 수행 단계의 초지부터 제7지까지는 소지장을 없애는 일을 시작할 수가 없습니다. 제7지까지는 버려야할 번뇌장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불청정한 단계라고 합니다. 제8보살지에서 소지장을 없애기 시작해서 제9지와 제10지까지 계속합니다. 제8지부터 제10까지는 번뇌장들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청정한 3지’라고 부릅니다. ┃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귀류논증파에서는 번뇌장을 없애지 않고서는 소지장을 없앨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의 수행론에서는 중론의 논리를 체득함으로서 소지장을 제거할 수는 있지만 수행을 통해 번뇌장을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기에 그 부분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 ┃ ┃ ┃옴마니반메훔 ┃옴아훔바즈라구루파드마싯디훔 ┃ ┃┃ ┃┃법공(法空)을 완전히 자각할 경우, 아공(我空) 역시 자각할 겁니다. ┃┃ ┃┃궁극적 공성의 자각에서는 法과 我가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완전히 자각'하기까지 너무나 오랜 세월이 걸리기에, ┃┃ ┃┃아집이 강한 분의 경우 아공에 대한 추구가 어느 정도 무르익은 다음에 법공을 추구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습니다. ┃┃ ┃┃ ┃┃용수 보살의 중론에서는 공의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 ┃┃13-9) 大聖說空法 爲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위대한 성인께서는 갖가지 견해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空의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일 空이 있다는 견해를 다시 갖는다면 어떤 부처님도 (그런 자를) 교화하지 못하신다. ┃┃13-8) śūnyatā sarvadṛṣṭīnāṃ proktā niḥsaraṇaṃ jinaiḥ/ yeṣāṃ tu śūnyatādṛṣṭistānasādhyān babhāṣire// ┃┃空性이란 일체의 見解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여러 勝者들에 의해 교시되었다. 그러나 空性의 見解를 가진 사람들은 구제불능이라고 말씀하셨다. ┃┃ ┃┃24-11) 不能正觀空 鈍根則自害 如不善呪術 不善捉毒蛇 ┃┃空을 올바로 觀할 수 없어서 둔근기는 스스로를 해친다. 잘못된 呪術이나 잘못 잡은 毒蛇와 같이. ┃┃24-11) vināśayati durdṛṣṭā śūnyatā mandamedhasam/ sarpo yathā durgṛhīto vidyā vā duṣprasādhitā// ┃┃잘못 파악된 空性은 지혜가 열등한 자를 파괴한다. 마치 잘못 잡은 뱀이나 잘못 닦은 呪術과 같이. ┃┃ ┃┃ ┃┃법공을 자각함으로써 아공을 자각하고자 할 경우, 자칫하면 我有法空의 상태에 머물게 되기에 ┃┃ ┃┃앞에서 썻듯이 가치판단을 상실하여 막행막식하는 폐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 ┃┃따라서 이와 반대로, 아공을 자각함으로써 법공을 자각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안전합니다. ┃┃ ┃┃ ┃┃악행을 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유법공의 증상입니다. ┃┃ ┃┃생각 속의 개념(法)은 해체되었는데 감성에서 탐욕과 분노와 교만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유법공의 상태입니다. ┃┃ ┃┃ ┃┃<금강경>에서는 '무주상 보시(無住相 布施)'를 가르치는데, '베풀고도 베푼다는 마음이 나지 않는 베품'입니다. ┃┃ ┃┃예수의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 역시 이와 유사한 가르침입니다. ┃┃ ┃┃이 문장에 무주상 보시의 정신을 대입할 경우 '오른 손이 한 일을 오른 손도 모르게 하라'가 됩니다. ┃┃ ┃┃그런데 아유법공의 상태에서는 자칫하면 '악행을 하고도 악행을 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 악행'이라고 자기합리화 하기 쉽습니다. ┃┃ ┃┃예를 들어 계를 어기고도 '계의 자성이 공하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 ┃┃무주상 보시와 마찬가지로 지계의 경우도 '무주상 지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육조단경>에서 혜능스님이 말씀하신 無相戒입니다. ┃┃ ┃┃그런데 이는 '계를 어기고도 계를 어겼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 ┃┃진정한 無相戒는 '철저하게 계를 지키고 살지만 戒의 자성이 空하기에 戒를 지켰다는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 ┃┃'너무나 고결하고 착해서 자신이 고결하고 착하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이 무상계입니다. ┃┃ ┃┃ ┃┃이상의 조망을 我와 法에 적용할 경우 '보시'와 '지계'가 法에 해당합니다. ┃┃ ┃┃어느 정도 我執이 정화된 사람에게만 보시와 지계가 가능합니다. ┃┃ ┃┃아집이 강할 경우, 탐욕과 분노가 강하기에 보시와 지계의 마음을 내기 힘듭니다. ┃┃ ┃┃일단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사는 분들에게, ┃┃ ┃┃보시의 자성이 공하고 지계의 자성이 공하다고 가르치는 것이 무주상 보시이고, 무상계입니다. ┃┃ ┃┃다시 말해 아집이 희박하여 보시와 지계의 삶을 살 수 있는 분들에게 그런 보시 법과 지계 법이 공하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 ┃┃여기서 보듯이 아공을 추구한 다음에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법공을 추구하는 것이 수행의 올바른 순서입니다. ┃┃ ┃┃불교사상사적으로 보아도, 아공에 대한 조망(초기불교) 이후에 그에 대한 오해(일부 소승아비달마 불교도)가 일어나자 ┃┃ ┃┃더 미세하게 법공에 대한 조망(대승반야중관)이 제시됩니다. ┃┃ ┃┃ ┃┃귀류논증파로 분류되는 <중론> 주석가인 월칭(Candrakirti)의 경우 ┃┃ ┃┃아공에 대한 조망이 철저할 경우 법공에 대한 조망 역시 체득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와 달리 자립논증파의 시조인 청변(Bhavaviveka)의 경우,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가르치듯이 아공법유는 소승 아공법공은 대승이라고 주장합니다.) ┃┃ ┃┃수레를 태우면(燃) 바퀴와 손잡이 굴대 등이 모두 타듯이, ┃┃ ┃┃자아가 공함을 알면 자아의 구성요소인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의 법 모두 공함을 안다는 것입니다. ┃┃ ┃┃월칭은 소승의 공 사상을 아공법유, 대승의 공 사상을 아공법공으로 규정하는 청변의 주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 ┃┃이런 '수레 태우기'의 비유를 듭니다. ┃┃ ┃┃소승이든 대승이든 아공과 법공을 모두 알며 ┃┃ ┃┃소승과 대승이 차이는 공성에 대한 조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비심의 크기에 있다고, 월칭은 주장합니다. ┃┃ ┃┃소승 아라한은 현생에만 자비심을 발할 수 있지만, ┃┃ ┃┃대승불교의 경우 무한 보살도 후 성불을 지향하기에 그 자비심의 크기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 ┃┃ ┃┃월칭의 '수레 태우기' 비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공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원래 목표입니다. ┃┃ ┃┃수레를 태우기 위해 불을 붙인 후, 혹 나중에 다 타지 않은 부분이 있으면 다시 불을 붙여 완전히 태우듯이 ┃┃ ┃┃아공의 체득을 목표로 삼아 수행하다가, 어느 정도 수행이 무르익으면 법공의 체득을 위한 수행에 들어가야 합니다. ┃┃ ┃┃수레 전체에 대한 조망 없이 눈 앞에 보이는 바퀴를 태우고, 손잡이를 태우고, 굴대를 태우고 .... 와 같은 방식을 사용할 경우 ┃┃ ┃┃수레가 완전히 타기 전의 어느 단계에서 멈추기 쉽습니다. ┃┃ ┃┃ ┃┃질문에서 "법공을 자각하면 아공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쓰셨는데 ┃┃ ┃┃부처가 되어 최종적인 자각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그럴 수 있겠지만 ┃┃ ┃┃그렇게 '법공에서 시작해서 일체법의 공성을 완전히 파악하여 결국 아공까지 체득하게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합니다. ┃┃ ┃┃위의 수레의 비유를 들면서 월칭은 이와 반대로 '아공을 자각하면 법공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 ┃┃월칭은, 법공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공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 수레의 비유를 든 것입니다. ┃┃ ┃┃아공만 알면 법공은 자연히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 ┃┃ ┃┃현실적으로는 아공을 추구하다가 법공으로 들어가는 것이 위험하지 않습니다. ┃┃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을 먼저 한 후에,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미진한 분별을 씻어내기 위해 간화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 ┃┃물론 탐욕이나 분노의 마음이 너무 강한 분들은 위빠사나 수행 이전에 부정관이나 자비관을 충분히 닦아야 할 것입니다. ┃┃ ┃┃ ┃┃유식학에서 '넓은 의미의 번뇌'를 다시 좁은 의미의 煩惱障과 所知障으로 구분하는데, ┃┃ ┃┃번뇌장의 원인은 我執이고 소지장의 원인은 法執이라고 합니다. ┃┃ ┃┃번뇌장은 감성적 번뇌이고, 소지장은 인지적 번뇌입니다. ┃┃ ┃┃요새 말로 풀면 번뇌장은 정서장애, 소지장은 認知장애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 ┃┃자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정서의 문제가 일어나고, 개념(法)에 대한 고착 때문에 인지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 ┃┃어린 아이나, 짐승의 경우 '나'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못해도 자아에 대한 집착이 극심합니다. ┃┃ ┃┃인간의 동물적 본능에 '자아에 대한 집착'이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이를 '俱生起의 아집'이라고 부릅니다.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갖고 있는 '선천적인 아집'이란 의미입니다. ┃┃ ┃┃이와 달리 후천적인 아집은 '分別起의 아집'이라고 부르는데, ┃┃ ┃┃잘못된 교육이나 외도의 종교, 철학을 통해서 생긴 자아 관념을 의미합니다. ┃┃ ┃┃분별기의 아집은 언어를 알아야 생길 수 있습니다.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 ┃┃우빠니샤드의 아뜨만, 샹캬의 뿌루샤, 자이나교의 지와 등이 분별기한 '자아'입니다. ┃┃ ┃┃그런데 이런 '자아' 들은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후 남에게 배워서 안 개념이기에 ┃┃ ┃┃'자아'이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개념으로서의 자아', 즉 '법으로서의 자아'입니다. ┃┃ ┃┃ ┃┃<중론> 제18 관법품에서는 이러한 '법으로서의 자아'만을 논리적으로 논파하고 있는데, ┃┃ ┃┃<보리도차제론>에서는 이미 앞의 하사도와 중사도 수행을 통해서 ┃┃ ┃┃동물적 자아, 감성적 자아가 어느 정도 해소된 수행자들에 대해 상사도의 위빠사나품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 ┃┃<중론> 제18품에서 논파하는 자아가 '법으로서의 자아'일 뿐이라는 점을 굳이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 ┃┃그러나 <중론> 제18 관법품의 논증만 이해하면 무아를 체득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중론> 제18품에서는 '개념화 된 자아, '법으로서의 자아'를 논파할 뿐입니다. ┃┃ ┃┃따라서 '자아 개념'의 허구성을 머리로 이해하기 이전에 ┃┃ ┃┃'이기심의 뿌리이고 분노심의 원천인 감성적 자아'에 대한 집착을 먼저 많이 해소해야 합니다. ┃┃ ┃┃ ┃┃법공을 완전히 자각했다면 자연히 아공을 자각하겠지만, ┃┃ ┃┃이와 반대로 아공을 자각함으로써 자연히 법공을 자각할 수 있도록 수행하는 것이 '위험하지 않은' 수행 순서입니다. ┃┃ ┃┃그리고 止觀 수행의 궁극적 목표에서 소승과 대승의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공성의 자각입니다. ┃┃ ┃┃공성을 자각할 경우 탐, 진, 치 삼독의 번뇌가 완전히 제거됩니다. ┃┃ ┃┃소승과 대승의 차이는 방편의 차이입니다. 이타심의 차이입니다. 이타심의 유, 무가 아니라 이타심의 量의 차이입니다. ┃┃ ┃┃------------------------------------- ┃┃ ┃┃ ┃┃┃회원중 한 분이 질문 하신것에 대한 교수님의 답변중 622번 글을 발췌하였습니다. ┃┃┃ ┃┃┃위빠사나적인 참선이든, 간화선적인 참선이든, 참선의 목적은 ‘생각’의 허구성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는 ‘무상한 감각의 흐름만 실재함’을 자각함으로써 ‘생각의 허구성’을 자각하게 하고, 간화선은 생각을 ‘중도의 궁지’로 몰고 감으로써, 우리의 분별적 생각이 모두 허구임을 자각하게 합니다. 참선을 통해서는 우리의 생각이 축조해낸 세상의 모습이 마야(幻)과 같이 허구임[法空]을 자각할 뿐만 아니라 ‘불변의 나(我)’가 있다는 생각조차 허구임[我空]을 자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참선의 목적은 ‘참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참된 나’를 보고자 하는 의도가, ‘애당초 성립될 수 없는 의도’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나’는 원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위 글은 공성에 대한 정의를 잘 내리시면서 부정해서는 않되는 것을 잘 설명해주시는 글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인식의 대상이었던 세상의 모습이 허구임을 아는 것이 법공이며, '불변하는 나'가 있다는 생각이 허구임을 아는 것이 아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몇가지 질문을 드려봅니다. ┃┃┃ ┃┃┃제가 공부하기로 귀류논증파에서는 아공과 법공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식이 성립하려면 인식의 주관과 대상이 필요합니다. 자성이라는 것은 인식의 주관이 대상을 영원불변의 것으로 계탁분별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므로 부정해야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대상을 부정함으로서 무자성을 자각하는 것이라는 것은 가벼운 자각이며, 보다 근원적인 자각은 '내가 있다'를 근거로 인식의 주관과 대상으로 분리하게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으로서 아공이며, 이보다 더 근원적인 자각은 인식자체가 '내가 있다'를 만든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으로서 법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식자체가 '내가 있다'라는 착각을 만들고, 더불어 '내가 있다'는 착각이 나와 대상세계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 ┃┃┃중관을 공부해서 법공을 자각했더라도 수행을 통해 아공을 자각해야한다는 말씀보다는 법공을 자각했다면 자연히 아공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귀류논증파의 견해가 더욱 설득력이 있어보인다는 것입니다. 교수님의 견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소승의 지관수행과 대승의 지관 수행의 차이점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서 자성이나 '내가 있다'를 대상으로 지관수행을 한다면 소승의 수행이요, 공성을 대상으로 지관수행을 한다면 대승의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교수님의 견해를 부탁드립니다. ┃┃┃ ┃┃┃바른 견해를 세우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감히 여쭈어 봅니다. 항상 진지하게 한치의 오차없이 불자의 자세를 놓지 않으시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드려 답변을 주시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쁘시겠지만 정확한 정법을 들을 수 있는 사이트가 여기뿐이기에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 ┃┃┃ ┃┃┃옴마니반메훔 ┃┃┃옴아훔바즈라구루파드마싯디훔 ┃┃┃ ┃┃┃ ┃┃┃ ┃┃┃┃선광님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킨 것은, 다른 견해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올린 글의 양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 ┃┃┃┃회원 게시판에도 선광님께서 쓰신 긴 글이 많이 올라간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 ┃┃┃┃관심 있는 분들께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자유게시판의 문답에 그런 정도로 많은 분량의 글을 계속 올리실 경우 참으로 난감할 것 같아 ┃┃┃┃ ┃┃┃┃선광님의 '글 쓰는 기능'만 정지시킨 겁니다. ┃┃┃┃ ┃┃┃┃ ┃┃┃┃저의 경우, 본 게시판에 대해 답글을 달 때, 우선 질문이나 제안의 양이 너무 많으면, ┃┃┃┃ ┃┃┃┃답글을 달지 말지 망설이게 됩니다. ┃┃┃┃ ┃┃┃┃질문이 막연하거나 너무 많은 양의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이 올라올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 ┃┃┃┃많은 다른 일들을 하면서 본 홈페이지와 게시판을 겨우 운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선광님이 개인 블로그나 사이트를 알려주시면 그곳을 홍보해 드리려고 했는데 아직 메일을 보내지 않고 계십니다. ┃┃┃┃ ┃┃┃┃ ┃┃┃┃불교에 대한 어느 정도의 조망을 갖춘 분들은 각자 자신이 계신 곳에서 중심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 ┃┃┃┃어느 정도의 조망을 갖춘 이후에 불교와 관련하여 토론을 벌일 경우에는 논쟁이 될 뿐 소득이 없습니다. ┃┃┃┃ ┃┃┃┃스포츠 경기에서와 같이 금메달을 따기 위해, 남과 경쟁하기 위해 불교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 ┃┃┃┃아래 올려 주신 정영근 교수님 글과 선광님 글의 경우도 아직은 자세히 읽어 보지 않았습니다. ┃┃┃┃ ┃┃┃┃모두 좋은 글일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고, 특별한 질문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 ┃┃┃┃루드라님의 경우도, 불교에 대해 어느 정도의 식견을 갖추신 후에는 ┃┃┃┃ ┃┃┃┃스스로 계신 곳에서 '중심'이 되어 우리 사회를 밝히는 등불의 역할 하시기 바랍니다. ┃┃┃┃ ┃┃┃┃ ┃┃┃┃본 게시판은 불교와 관련하여 진심으로 궁금한 질문 한 두 가지를 올리고 ┃┃┃┃ ┃┃┃┃그에 대해 답하는 식으로 운영되면 좋겠습니다. ┃┃┃┃ ┃┃┃┃다른 많은 일들을 하면서 본 게시판을 운영하기에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역할은 그 정도뿐입니다. ┃┃┃┃ ┃┃┃┃----------------------------------------- ┃┃┃┃ ┃┃┃┃┃김성철 교수님의 사이트가 저에게는 좋은 의지처가 되어왔습니다. 그러한 사실에 머리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 게시판이 불법을 공부하는 도반들에게 파사현정의 자리가 되어왔음을 믿어왔는데 파사현정의 모습에 철저하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고, 불교적인 다른 견해를 가졌다는 이유로 선광님의 회원자격을 정지시키는 모습에 절치부심하여 글을 올립니다. ┃┃┃┃┃ ┃┃┃┃┃아래의 글은 김성철 교수님이 쓰신 글로서 저에게는 좋은 가르침으로 받아드린 부분입니다. ┃┃┃┃┃ ┃┃┃┃┃신비체험의 대상으로 생각되는 절대무에 대한 자각은 이전까지 자신이 바라보던 세계가 존재론적 근거를 갖지 못한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망이 우리의 사유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아직 세계와 인간의 근저에까지 도달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개념적 사유의 능력과 아울러 희노애락의 감정을 갖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때의 현실적 자아는 종교적 수행과 실천을 거쳐야 비로서 절대무와 합일한다. 찰나적으로 명멸하는 심신의 흐름에 주시하는 명상 수행을 통해 우리는 자아가 실재한다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이타행과 자기절제의 실천을 통해 자아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순화될 수 있다. 이렇게 수행과 실천을 거치면서 현실적 자아가 무화될 때 진정한 자비심이 용출된다. 자아에 대한 착각과 집착이 제거될 때, 역으로 모든 생명이 한 몸이라는 사실이 체득된다. 절대무를 체득한 인격은 베푸는 자와 받는 자의 개념적 구별이 사라졌기에 베푸는 자라는 교만심도 없고, 받는 자를 멸시하지도 않으며, 나와 남의 감정적 구별이 사라졌기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마치 내 몸 같이 대한다. 즉 동체대비의 윤리를 실천한다. 동체대비의 마음을 터득한 자의 경우,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세계 내에서 고통 받고 살아가는 개개의 중생이다. 그래서 절대무를 터득한 인격은 고통받는 중생의 수준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역할로 자비를 실천한다. 이렇게 절대무를 지향하며 실천하는 인격을 불교에서는 보살이라고 부른다. ┃┃┃┃┃ ┃┃┃┃┃다른 견해에 대한 논문의 부분을 발췌하여 올립니다. ┃┃┃┃┃논문제목 '각의 두가지 장애' 소제목 '원효의 <이장의>를 중심으로' 저자 정영근 ┃┃┃┃┃ ┃┃┃┃┃원효는 <이장의>에서 각의 두 장애에 관하여 논함에 있어서 현료문과 은밀문이라는 범주를 가지고 분별비판한다. 현료문에서는 <유가론>을 중심으로 유식법상가의 설을 종합하고 있으며, 은밀문에서는 <대승기신론>을 중심으로 유식계에 대한 측의 교의를 조직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문을 상호 밀접히 관련시킴으로써 이설을 원융회통시킨다. 이에 따르면 현료문의 이장이 은밀문의 번뇌애에 포섭되고, 번뇌애는 지애와 본말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장애의 근본은 지애인 무명이라고 하는 것에도 귀착된다. 이처럼 장애의 근본이 하나인 진리를 알지 못하는 근원적 무지성이라고 하는데서 장애가 지니는 인식적 의미가 두드러지게 드런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실천적 의미가 결합되어있다. 무지때문에 인간의 괴로움이 생기며, 이러한 무지가 소멸되면 인간의 고통도 소멸한다고 하는 연기의 틀 위에서 무지가 문제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지는 근본적으로 실천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지에 대가 되는 반야지가 단순히 실재하는 고통이나 장애를 없애는 수단인 것이 아니라, 반야지 그대로가 곧 고의 해탈이며, 장애가 없는 자유라고 하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와같이 앎과 실천의 문제가 하나로 결합되어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불교의 변치않는 입장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것도 지혜보다는 자비의 실천행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불교의 성격이 바뀐 것이라고 보기 보다는 하나로서의 지혜를 참으로 깨운친데서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결과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각기 따로 떨어진 개별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한 개체가 혼자 열반에 든다는 생각 또한 이치에 닿지 않기 때문에, 자비를 강조하는 보살의 이상은 곧 무아의 진리에 철저한 데서 당연히 귀결되는 결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낮은 단계의 지식으로부터 높은 단계의 지혜로 전환함에 있어서 자비를 포함하는 무분별후득지가 얻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앎과 실천의 문제가 분리되어 고찰됨이 없이 전체성을 갖춘 하나의 진리로 되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흔히 수행상의 문제로만 취급되는 장애를 인식적인 측면에서 고찰하여 그 인식적 의미를 드러내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불교가 가지는 앎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입장을 천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장애의 극복은 곧 깨달음을 얻는 것이며, 자리와 이타가 동시에 성취되는 청정한 경지의 현현 즉 일심의 원천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원효의 입장을 불교사상체계와 상호 관련하여 밝혀 보았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 위와같은 논의를 하는 가운데서 장애속에 포함되어 있는 인식적인 결함 및 잘못된 견해들을 지적해내는 일이 가능하므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밝혀냄으로서 불교에서 올바른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성격을 밝히려고 했다. 잘못된 견해를 파척하는 것은 곧 바른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견해들의 허위성을 드러내고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진리에 접근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올바른 인식이란 실제를 제한하고 왜곡시키는 특정한 편협된 관점으로부터 전체적인 관점으로의 전환이라는 앎의 태도의 개정에 의해서 즉 모든 입장을 버리고 무입장의 입장에 선다고 하는 실천적 행위에 의해서 저절로 드러나는 것임을 밝혔던 것이다. 따라서 인식과 실천은 분리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이 여기서도 확인된 셈이다. 이상과 같이 장애라는 것은 고통이 없는 상태인 해탈을 방해하는 것으로서 또한 인식적 결함 또는 잘못된 견해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제거되고 부정되어야 할 것으로 문제된 것이다. 즉 장애의 극복은 파사요, 각의 현현은 현정이라고 하는 파사즉현정의 관계속에서 각과 장애는 함께 논의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 ┃┃┃┃┃그리고 아래의 글은 선광님의 견해를 발췌한 것입니다. ┃┃┃┃┃ ┃┃┃┃┃쫑카파를 비롯한 다른 종파의 논사들의 저서들은 거의 대부분 학파적 분류의 시비를 가리면서 중관의 이치를 알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중관학의 발전 자체가 각 학파와 학자들의 견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공부하고, 그럼으로써 보다 더 균형잡힌 중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식으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쫑카파의 “보리도차제론”은 학문적 수행지침서로서 만이 아니라, 학문적 이론서로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티벳에서 귀류논증으로 대표되는 쫑카파 대사의 저서는 귀류논증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문헌이 될 수 있습니다. 귀류논증과 자립논증의 구별이 티벳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그 근거는 월칭 보살의 논서에서 유래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귀류논증과 자립논증에 대한 “둡타”식 기준도 겔룩파와 카규파 사이에도 차이점이 있어서, 실제로는 많은 티벳의 논사들이 그 둘을 방편상 섞어 가면서 논지를 전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쫑카파의 “보리도차제론”의 “사마타 품”이 그 한 예인데, 지혜품에서는 카말라실라나 청변의 중관견해를 논박하고 있지만, “사마타 품”에서는 긍정적으로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티벳불교사에서 쫑카파 대사의 남다른 점은, 인도의 각논사들의 저서들과 경전들을 이해함에 있어서 어떤 방향에서 접근할 것인지 귀기울일 만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 ┃┃┃┃┃세 분의 견해를 보면서 무분별후득지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는 기회를 가져봅니다. 귀류논증의 입장을 강조한 선광님의 태도를 가볍게 볼 것은 아니라는 판단에 감히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다소 선광님의 글이 비판적인 느낌과 가르치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지만 진리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확립하고 증득하는데 있어서 공부하고 넘어가야할 큰 숙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 ┃┃┃┃┃이 글로 인해 저도 회원자격이 박탈될까 두려움이 앞서지만 '청출어람'이라 생각하시고 너그럽게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 ┃┃┃┃┃ ┃┃┃┃┃ ┃┃┃┃┃옴마니반메훔 ┃┃┃┃┃옴아훔바즈라구루싯디훔 |